김종영, 어떻게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은사·아버지 무한신뢰로 조각가 길 걸어

중학교 2학년인 김종영이 서예로 동아일보 주최‘전조선학생작품전시회’에서 일등을 하였으며, 워낙 그 실력이 출중하여 심사위원들이 믿기지 않아 결과발표 후 그를 불러 그들 앞에서 다시 써보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렇다면 서예를 통해 예술 세계에 입문하게 된 그가 어떻게 서양미술 중에서도 특히 조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 조모상, 20x22x42㎝, 석고에 채색, 1936.
유족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남다른 흥미와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뒷산에서 진흙을 뭉쳐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에 열중했다고 한다. 휘문고보 입학 후에는 방학에 고향집에 내려오면 늘 뒷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휘문고보 동기동창이며 일본유학 생활도 같이 하였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같이 근무했으며, 김종영 사후 우성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했던 미학자(美學者) 고 박갑성의 회고에 의하면 김종영이 조각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 이유는 당시 휘문고보의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우석(雨石) 장발(1901-2001)의 권유에 의한 것이다.


장발은 4·19혁명 후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의 동생으로, 1919년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던 중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학에서 미술실기와 이론을 공부하고, 1926년 귀국하여 오랜 시간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해방 후 서울시 학무국장을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설립을 주도하였고,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까지 재직하였으니 그가 해방 후 한국미술교육의 커다란 초석을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휘문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장발은 장래 한국미술을 이끌어 갈 인재를 발굴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김종영은 당시 이쾌대, 윤승욱 등과 더불어 그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가로서의 역량을 갖춰 나갔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 중 장차 한국미술의 조각 분야를 담당할 인재를 찾고 있었으며, 자신의 제자 중에서 우수한 학생을 선택하였는데 바로 김종영과 윤승욱이었다. 이런 연유로 장발은 김종영에게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여 그는 조각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 동소문고개, 64x49㎝, 유화, 1933.
장발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으로 재직하던 때인 1948년에 김종영을 부름으로써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므로 김종영이 휘문고보로 진학하여 은사 장발을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인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김종영이 조각을 하게 되는데 은사 장발과 더불어 그의 아버지 성재 김기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영남의 전통 사대부집안인 김해 김씨 23대 장손인 김종영이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조각을 전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종영의 아버지는 당시 아들이 조각을 공부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관리, 법관들은 다들 죄를 짓는데 내 자식은 짐승으로 치면 제비인지라 남의 곡식 축내지 않고 깨끗이 살 것이다.”식민지 상황에서 아들이 선택한 길에 대해 아버지의 무한한 신뢰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김종영이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훌륭한 은사를 만난 것과 더불어 아들을 무한히 신뢰해 준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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