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서예대회서 1등 한 중학생 김종영

우성 선생의 붓글씨는 본령인 조각보다도 더 김종영다운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김종영의 제자이며, 김종영미술관 관장인 최종태는 김종영의 서예에 대해 “우성 선생의 붓글씨는 본령인 조각보다도 더 김종영다운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하였다. 예부터 ‘서여기인(書如其人)’ 이라 하여 ‘글은 곧 그 사람’ 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에게 서예가 더 김종영다운 일이라 함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진다.

당나라 777년경 안진경이 쓴 ‘이현정비(李玄靖碑)’
서예가 더 김종영다운 일(?)

김종영이 1915년에 태어났으니 그가 5살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종교지도자와 중인출신의 새로운 지식인들이다. 과거 대한제국의 관료와 사대부 출신의 유학자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당파싸움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20년 동경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변영로는 ‘동양화에는 시대정신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다’고 하였다. 7년 후 역시 동경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김용준은 서화가는 ‘가슴과 머리를 잃어버린 불구자’로 ‘술에 취해 재주로 먹을 가지고 희롱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김종영은 한학과 붓글씨를 배웠고,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서예작품을 한 번도 전시하지도 않았고, 서예에 정진하고 있음을 주위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가족 말고는 몇몇 사람들만이 알고 있었다.

▲ 1932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인터뷰기사
김종영은 5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부인 화산(華山) 김정헌(1877-1945)은 대한제국시절 비서원 승지를 지낸 분이고, 김종영의 7대조는 영남사림파의 기수였던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이다. 이런 가문의 내력을 고려하면 김종영이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한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김종영이 자신의 호를 우성(又誠)이라 할 정도로 그가 본받고자 한 아버지 성재(誠齋) 김기호의 학문과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가 김종영이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은 여러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종영이 당대 여느 미술학도들과 달리 명망 있는 사대부 가문에서 정통 문사(文士)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어떻게든 빨리 서양을 따라 가고자 했던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전통적인 서구 사상의 핵심을 소화하고, 그 보편적인 형이상학적 원리 속에 동양적인 전통을 살과 피로 자연스럽게 종합한 작가이자 교육자로 우뚝 서게 되는 초석이 되었다.

일생에 두 번 공모전에 참가

김종영은 일생에 단 두 번의 공모전에 출품하였다. 첫 번째가 휘문고보 2학년 때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남여학생작품전’이고, 두 번째가 1953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전이었다. 1932년 그는 중등습자부에서 1등을 하여 그 해 9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수상 소감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 군은 경남 창원 생으로 어릴 때부터 부형(父兄)의 단속아래 글씨공부를 하게 되어 남과 달리 일찍이 어른 필력으로 학교에서 익히는 시간외에도 자연히 글씨공부에 항상 관심을 가졌다한다. “이번에 쓰신 것은 무슨 체입니까?” “안진경체라고 할까요.” “두 폭이나 되니 여러 시간 걸리셨겠습니다.” “하숙에서 하루 한 장에 두어 시간씩 한 이틀 두고 썼습니다.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날짜가 임박해도 시작을 못하였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여러 번 일깨워 주셔서 출품을 했습니다. 그러나 입상까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하여간 많이 써보고 쓸 때 온 정신을 드려야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알리어지는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심사위원들이 이 글을 중학생이 쓴 것이 맞는지 확인하고자 김종영을 불러 자신들 앞에서 직접 써보라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잠시 세상에 알려진 김종영의 서예작품은 이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각가인 김종영은 어떤 관점에서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던 것일까?

[글·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