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10월 8일자 모 전문지 기사를 보면, 보건복지부가 국회에 제출한 2011년 기준 종합병원의 의약품공급업체에 대한 구입대금 결제기간은 종합병원 318곳 중 48.1%인 153개 병원이 180일을 훨씬 넘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제기일이 300일 이상인 병원이 35곳이나 되고, 365일이 넘는 병원도 21개에 달한다. 4개 병원은 각각 무려 750일, 840일, 900일, 960일을 초과하고 있다. 이는 비단 종합병원뿐만 아니라 병원 및 의원 등도 유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로지 우리 한국의 의약품 유통시장에서만 존재하는 악성 거래관행이다.

그동안 필자는 외국의 경우를 알기 위해 자료를 찾으면서 ‘IMS Health’에 부탁도 해보고, IFPW(국제의약품도매업자연맹) 총회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국의 인사들에게 그들 나라의 의약품 거래대금 결제기간을 문의해 봤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런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거래가 성사되면 곧바로 결제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며 하나같이 의아스럽게 생각하였다.

2012년 10월 15일에 발표된 한국은행의 ‘2011년 기업경영분석’자료를 보면, 국내 산업 전체의 외상매출대금 회수기간은 평균 50일로 나와 있다. 식료품업 36일, 섬유업 48일, 컴퓨터와 반도체업이 각각 52일·58일, 화장품 등 기타화학 57일, 의료기기업 75일, 자동차제조업 44일, 광업 72일, 일반도매유통업이 불과 43일 등으로 나타났다.

거래대금 회수기간이 길기로 소문난 인쇄출판업이 68일, 주류업이 70일, 건설업이 84일, 선박제조업이 88일, 국내 전 산업 중 최장기인 시멘트석회업도 89일에 불과하다. 이들과 위에 예시한 국내 병원업계의 의약품 거래대금 결제기간을 비교해 보라.

그러면 왜 세계에서 그 사례가 없는 최악의 약품대금 결제기간 초장기화 사태가 국내 의약품 유통시장에서 관행화된 것일까? 혹시, 병원이 환자에게 외상으로 투약해 주고 환자와 건보공단으로부터 그 대금을 아주 늦게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환자의 자기부담 약제대금은 모두 즉시 현금 지불이다. 또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하면 병원 등이 환자에게 투약하고 건강보험에서 약제비를 받는 기간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아무리 늦어도 45일 이내이기 때문이다. 이를 상기 예시한 병원 결제기간과 결부시켜 보면, 병원은 45일 이내에 약제비를 다 받고서 4개월 15일 이상 늦춰 180일 이후에나 의약품 공급업체에게 외상대금을 결제하는 셈이 된다.

그럼, 그 결제지연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약품 거래에서 갑·을 관계에 있는 병원과 의약품공급업체(도매업체 또는 제약업체) 간의 ‘힘의 논리’이외는 딱히 집히는 것이 없다. 의약품 소비시장에서 병원은 약을 사용해 주는 힘 있는 ‘황제’격이고, 의약품공급업체 등은 약을 진상하는 힘 못쓰는 ‘신하’격이니, 황제가 신하보고“이미 돈 다 써 버렸어. 나 지금 돈 한 푼 없어. 180일 이전에는 돈 못줘!”하면 그만이니까. 그렇다고 차압을 붙일 수 있겠는가? 쫓겨날 것이 뻔한데. 이외에 다른 원인을 더 찾을 필요가 있을까?

초 장기화되고 있는 약품대금 결제기간은 적어도 의약품 도매유통업체에게는 ‘손톱 밑의 가시’정도가 아니라 ‘염통 밑의 쉬’이상의 것이다. 까딱 잘 못하다간 운영자금 부족으로 흑자도산의 위기에 몰릴 판이다. 예컨대 결제기간이 365일인 병원에 월 평균 2억 원씩 의약품을 납품하는 도매유통업체는 결제지연으로 인한 운영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24억(2억×12개월)원을 추가로 차입해야 하고, 그 때문에 억울한 금융비용을 최소이율(연리7.2%)로 따져도 매년 1억7300만(24억×0.072)원씩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한국도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을 훌쩍 넘겼고, 무역량 세계 7위의 선진국 시대를 열고 있다. 지금 2013년! 힘 있는 자에 의해 지배되는 낡은 구시대적 불공정 거래관행은 선진국 수준에 걸맞게 더 이상 존속돼서는 안 된다. 당장 의약품시장에서 말끔히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시장 구성원 간의 자율적인 협상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병원 등은 ‘갑의 권력’을 절대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최악의 약품 대금결제 관행을 타파하고 혁신하는 방법은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피를 보지 않고는 혁명은 성공하지 못한다. 첫째(최선책), 결제기간이 180일 넘은 병원과는 차후 무조건 현찰로만 거래한다. 둘째(차선책), 법령으로 약품 거래대금 결제기한을 90일 이내로 의무화한다.

류 충 열
파마컨설팅 대표

전의약품도매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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