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날개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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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는 순간은
누구나 행복하다
환상의 날개를 타고
끝도 없이 달리는
아름다운 세계

그곳엔
감미로운 선율이
흥건히 젖어 있고
너른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아늑한 마을이 있다

코스모스와
여치가 한데 어울려
그림을 그리는 가을 들녘
고추 잠자리
맴돌다 간 자리
낙엽 홀로 뒹구는
허전한 빈 가슴에
환상의 날개를 타고 꽃길을 간다

때론
사과나무 감나무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길
온갖 새들 둥지를 트는
공해 없는 맑은 하늘
그런 평화로운 동산을 거닌다

어느 새
뉘엿뉘엿
짧은 해가 석양 빛에 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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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이화의대. 김석희 산부인과의원 원장. 2007년 작고.
등단(한국문학예술).

어쩔 수 없이 하루가 짧다는 걸 깨닫는 건 저녁 해질녘이다. 한 해가 길지 않다는 건 가을쯤에야 깨닫는다. 감미로운 꿈에 젖어 가슴으로만 날던 그 시절들이 낙엽처럼 잦아들며 짙은 노을로 깊숙이 물들어오는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그 곳이 환상의 날개 위였음을 알아차린다.
어느 이는 퇴행성 변화라고 일컫기도 하나 따지고 보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가는 당연한 과정이니 ‘퇴행’은 표현이 다소 어긋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과정을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억지로 정지시켜 놓고 정의하려는 억지 때문일 것이다. 굳이 이른다면 ‘낙엽은 떨어지고 사과와 감이 열리며 세상 이치가 차차 맑아지며 졸음이 편해지고 있음.’이다. 어차피 내가 보고 있는 석양은 서쪽 이웃 나라의 그대에겐 동녘의 아침해가 아닌가. 하루 중에 사위의 사물이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때는 해질녘이다. 그래서 김소월도 에서 「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해지고 오늘날은 가노랍니다/윗옷을 잽시빨리 입으십시오/우리도 산(山)마루로 올라갑시다//동무들 보십시오 해가 집니다/세상의 모든 것은 빛이 납니다/이제는 주춤주춤 어둡습니다/예서 더 저문 때를 밤이랍니다」[실제(失題)1 전반부]라고 노래하고 있다. 분명 이 가을을 저녁 노을처럼 맞으며 졸음이 편해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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