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는 진정 천재였고 시대를 한발짝 앞서가는 세계적인 리더였다. 개인용 컴퓨터라는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킨 것도, 스마트폰을 널리 확신시킨 것도 그였다. 하지만 인류역사의 큰 획을 긋고 간 그가 만약,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과연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지능지수와 노력에 의해 수월성(merit)을 획득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를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엔 우리말로 쉽게 풀어 '능력주의'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능력주의가 암암리에 당연시되는 것 같다.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님의 소위 '백'으로 성공하는 사람을 보며 정의감이 꿈틀대는 생각들의 기저에도 '능력주의'가 있다. 하지만 '능력주의'역시 진리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스티브잡스가 제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노비로 태어났다면 우리시대에 거둔 만큼의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컴퓨터 기술도 없고(technology), 주식회사를 세우지도 못하며(economy), 천한 신분(social status) 때문에 자기 뜻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능지수와 노력에 의해서만 개인의 수월성이 획득되지 못한다. 사회적 지위, 문화, 시대적 배경이 없었다면 그는 지금의 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영웅이 시대를 열어제끼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이다. 유비, 조조 등 수많은 삼국지의 영웅들은 한 왕조 말기의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유비는 계속 농사나 지어 살았을 것이고 조조는 공무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함께 졸업한 동기들을 봐도 그렇다. 물론 머리도 좋고 노력 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렇게 뽑힌 집단이다 보니 '능력주의'는 더더욱 당연시 받아들여진다. 필자가 의대생 때 전 학년의 절반 정도를 외국대학에 교환학생으로 보내주는데,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자기들이 가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충격을 먹은 적이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꽤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성공의 달콤한 과실을 따먹을 때다. '능력주의'에 물들어 난 사회에 빚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리더가 되지 않을까. 난 그것이 걱정이다. 그런 사고하에 요새 젊은이들은 도전의식이 없다고 나무라고 기업가 정신이 사라졌다고 탄식만 하는 리더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저변이 깔린 저변에서 배출한 엘리트들이 이끌어가는 사회에서 ‘복지’의 개념은 한낱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랫 것들에게 베푸는 자선의 의미밖에 가지지 못한다. 누군가 아직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필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만약 당신이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났다면 그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박 제 선
조천보건지소 공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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