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잡지를 보다가 ‘저우룬파’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하기에 검색해보니 ‘주윤발’이란다.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은 현지어를 그대로 쓰는 것으로 되어있다. 중국어의 경우 1911년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이전 시대 사람은 한자음으로, 이후의 사람은 현지어로 적는다. 하루아침에 ‘성룡’은 ‘청룽’이 되고, ‘이연걸’은 ‘리롄제’가 됐다. 어릴 적 스크린을 장악했던 우상들이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탕웨이’를 ‘탕유(湯唯)’로 ‘장쯔이’를 ‘장자이(章子怡)’라 부르면 또 얼마나 어색할지 모르겠다.

지난 7월 출범한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가 국어기본법의 한글전용정책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현재의 정책으로는 ‘단순문맹’은 퇴치할지 모르나 우리말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실질문맹’을 양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한글단체들은 이러한 행동이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일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의료계 일각에서는 의학용어를 우리말로 쓰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우리말 용어로 된 해부학 교과서가 처음 등장하였고, 환자차트도 우리말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이러한 한글화가 환자의 이해를 돕고 정확한 진단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01년에 나온 의학용어집 4집에서 이러한 의학용어의 한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기본원칙에 “기존의 영어와 라틴어로 된 용어를 모두 우리말로 바꿔 의사와 환자 간 원활한 의사소통을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명시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홱보기못함증(oculomotor apraxia), 딴곳임신(ectopic pregnancy)과 같은 용어들이다. 영어와 라틴어보다 더 외래어 같은 용어의 등장에 의사들뿐 아니라 환자들까지도 어리둥절했고, 그러한 여론을 받들어 의협 100주년인 2008년에는 한글용어와 한자용어의 병기를 허용한 5집이 발간되었다.

의학용어의 한글화가 의료계 전체의 보편적인 의견인지는 앞으로도 검토가 필요할 듯하다. ‘금식입니다’를 ‘NPO(nulla per os)’라 쓰는 것은 바쁠 때 그만큼 경제적이기도 해서다. ‘치료법을 ‘Tx’로, 처방을 ‘Rx’로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렇게만 읽고 쓰면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말 용어도 좋지만, 의사와 환자의 소통을 위해서는 좀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진료기록을 작성할 때에도 환자가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난다면 ‘c/c(+/+)’라고 쓰는 것에 덧붙여 “목이 컬컬하고 가래가 목에 걸려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기재하면 환자는 물론 인계를 받는 의사가 환자를 파악하기에도 도움이 된다.

수업시간엔 온통 영어로 가득한 슬라이드에, 해리슨 책도 영어로 읽어야 좋다며 배우지만 시험문제는 한글로 나오는 현실, 그러다가 임상실습 때 발표는 영어로 하지만 또다시 국가고시는 한글로 치는 현실에서 효율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의학용어의 한글화가 마냥 비효율적이라고 보기엔 한 가지 일화가 마음에 걸린다. 필자는 얼마 전 한 일본인으로부터 일본의 노벨상수상에 대한 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일본은 1980년대에 의학용어의 일본어화를 달성했다. 학부에서도 일본어로 된 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최신 해외저널들은 발간 즉시 일본어로 번역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사들의 영어발음이 안 좋은 것만 보고 그들이 최신지견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큰 오산이라고, 오히려 번역이 완벽하기 때문에 한국의사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일본은 노벨상수상이 가능하다는,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지만 그럴듯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빨갛다’라는 단어 하나 밖에 없으면 ‘피’와 ‘장미꽃’을 한 가지로 인식하게 된다는 사피어 울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처럼 언어는 사고를 지배할 지언데, 의학용어의 올바른 정착도 여러 논의를 거쳐 결정해야할 문제라는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다.

의학용어의 한글화는 의사와 환자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인데, 의사-환자와의 관계를 표현할 때 흔히 쓰는 ‘라포르(rapport)’도 ‘래포’ ‘라뽀’ ‘라포트’ 등으로 잘못 표기되는 것을 보면 용어를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김 기 현
강진군 보건소 공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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