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출신으로 의학전문기자를 하던 선생님께서 의사들의 아이디어로 특허를 출원해주는 일을 도와주는 회사를 설립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를 보고는 정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이디어는 깊은 전문성에서 나온다는 평소 신념 때문이다.

요즘은 사회 전반에 걸친 대세의 흐름이 디자인으로 넘어온 것 같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지난 6월 ‘Forget B-school, D-school is Hot’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과거에는 세계 최고의 인재가 Business school로 몰렸는데 Design school쪽에서 가르치는 마인드나 방법론이 앞으로 세계를 선도할 거라는 이야기다. 기존에 경영컨설팅회사에서 담당하던 일들의 상당부분을 디자인컨설팅 회사에서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의료계에서도 디자인의 흐름은 시작됐다. 최근의 경향에 따르면 디자인은 시각적이거나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경험, 감정까지도 다루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의 가장 깊은 면을 다루는 의료가 디자인 분야에서는 매력적인 소재다.

지난 7월 국내에서도 서비스디자인 네트워크 세미나가 열렸는데 전체 세션의 1/4정도가 의료에 관련된 것이었다. 연자 중 한 명이 만성질환 관련 의료서비스디자인 모델을 들고 나와 발표를 했는데 마지막 끝맺음이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수많은 만성질환관련 의료서비스가 나왔는데 모두 실패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내 생각에 지금까지의 실패는 당연해 보이며 그 당시에 제시된 서비스도 그다지 성공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 세미나에 등장했던 어떤 의료서비스도 놀랍지 않았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는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나온다. 현장의 외부에서 관찰하고, 타자로서 현장에 들어가 며칠 동안 체험하는 것만으로 깊은 이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현장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당사자만이 그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장의 의사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순간순간의 아이디어를 펼쳐주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 동안 진료를 하면서 분명히 그 과정에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고,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환자와의 관계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외부의 누군가가 현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바라봐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선생님들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계실 때 그것을 구현하는 일은 외부인에게 맡길 수도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생각은 오랜 경험과 고민에서 우러나온 결정체여야 의미가 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잘 살펴보면 결국 누구나 해오던 것들이다.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좀더 편하고 좋은 쪽으로 개선하는 것일 뿐이다.

과거 경영이라는 조류가 의료계를 휩쓸고 지나갔던 것처럼, 디자인이라는 조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의료가 그 조류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다. 바라만 보다가 휩쓸려버렸던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료의 철학을 기본으로 하여 조류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현장의 선생님들이 갖고 계신 아이디어를 먼저 펼쳐준다면 조류의 방향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 한종수
충남소방안전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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