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를 하며

정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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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잠자는 동안
눈곱만치 수염이 또 자라났다

그만큼의 수염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무수한 수염의 뿌리들은
나의 살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숨도 자지 않고 밤새워 일을 했다

아침잠에서 깬 나는
곧바로 면도를 한다

밤사이 나를 지켜온
내 살아 있음의 위대한 증거들이다
단숨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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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홍: 서울의대 졸업. 정의홍 안과.

2011년 시와 시학 등단,

기적은 어마어마하고 기이(奇異)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생물임을 때에 맞추어 확인시켜주는 현상이야말로 기적이다. 매우 작고 사소한 것을 눈에서 나오는 진득진득한 즙액 또는 그것이 말라붙은 눈곱에 비유한다. 성별, 계절, 건강 상태, 나이 등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수염은 하루에 0.27~0.38 mm 자라니 그 기능의 쓸모를 살필 겨를 이전에 눈곱만치 자란 게 분명하다. 제 육신의 피부 두께로 안팎을 나누어 나와 세상으로 가르는 일은 제 각각의 나름이긴 하지만 내 것이 세상으로 밀어 뻗어가는 증거는 눈곱만한 기적이 틀림없다. 어김없이 수염이 자라고, 그 수염을 살피고 면도로 다듬고, 그걸 詩로 쓰고, 그 詩를 감상하고….. 기적의 연속 고리다.
-동틀 녘 일출로/모든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는 건 기적이다//잠 아직도 수북한 눈이 그것도/파란 불과 빨간 불이 어김없이 갈리는/횡단보도를 건너는 건 기적이다//그 빌딩 현관으로 들어서는/반복의 엉겁결은 기적이다//어제 만난 그들 대부분을/도로 만나/다시 일상을 겪는 것은 기적이다//일상을 기적이라 놀라워하는 것이/기적 같은 일이라면/기적을 일상이라 시시하게 느끼는 건/더더욱 기적이다<‘기적(奇蹟)’ 유담>- 0.3mm쯤 되는 단(單)숨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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