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체형이 변하면 옷도 새로 맞춰 입어야 하듯이, 급성질환 환자보다 만성질환 환자가 훨씬 많아지는 환경이 되었는데도 진료환경은 바꾸기가 쉽지 않다.

우선 내가 지금 진료하고 있는 환경부터 만성질환 관리와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근 제2형 당뇨병(대부분 한국인 당뇨병이 이것이다)의 트렌드를 보면 개인별 상황에 따른 맞춤형 관리가 대두되고 있다. 운동, 음식습관, 교육 등의 '일상생활 습관 변화'를 좀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3분 진료를 지나 2분 진료로 달려가는 한국의료, 특히 내과계 개원의의 현실에서 운동, 식이습관, 교육을 어떻게 그 시간 내에 끝내란 말인가? 결국 약을 주로 쓰는 진료를 하게 되는데 이는 세계적인 만성질환 관리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것이다. 환자는 변했고 의학도 변해간다. 하지만 의료를 제공하는 방법은 옛날 그대로다. 이렇게 덕지덕지 발라 누더기집이 된 것이 한국의료의 현실이다. 리모델링을 하던가 아예 허물어 새로 짓든가 해야 한다.

그렇다면 만성질환관리를 위한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운동과 식이요법을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체크하고 기록할 수 있는 수단, 내원 시마다 체중을 체크하여 기록하는 수단, 주기적인 교육, 그리고 위 모든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는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선돼야 하는 건 ‘만성질환 관리 서비스에 대한 적정한 보험수가’ 다. 이제까지는 약 처방을 하면서 처음 오는 환자들에게만 짤막히 교육하고 끝나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당뇨 교육자료도 만들고 진료시마다 더 노력하려고 하지만 정부차원에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환자가 적은 보건지소에서도 맘이 잘 내키지 않는, 최대한 많은 환자를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개인의원에서 이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의료서비스는 크게 두 가지, 비보험 서비스와 보험 적용 서비스로 나눌 수 있다. 만성질환 관리 서비스는 고혈압, 당뇨 등 환자군이 많고 조절하지 않을 경우 합병증이 오므로 건강에 큰 해가 된다.

국민 건강보험이 적용돼야 하는 이유다. 만약 만성질환 관리 서비스에 보험수가를 매겨야 한다면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서비스의 '질'이다. 예를 들면, '당뇨교육 서비스'라고 해서 개개 의원마다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어떤 곳은 1분 만에 끝나고 어떤 곳은 20분 동안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서비스의 가격을 같게 매긴다면 20분 동안 열심히 환자 교육하려는 곳이 몇 곳이나 남을까? 많은 의사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한국 의료시스템이 이 방향으로 의사들을 몰아간다. 어떤 경우엔 폐업의 위기가 엄습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엔 그 동안 누려왔던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엔 더 잘 살고 싶어서, 어떤 경우엔 개업하면서 생긴 빚을 갚기 위해서 그렇다.

이렇게 서비스의 가격을 정해버리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보험수가를 같게 매겨야 한다면 자질구레하지만 몇 분 이상, 필수내용 꼭 들어가게 이런 조건들을 달아서 보험수가를 매겨야 할 것이다.

일단 수가와 '질 관리 기준'을 정부가 내려준다면 이 인센티브를 받으려고 민간의료기관에서는 알아서 나머지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할 것이다. 만성질환 관리는 이렇게 시작할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 

 

박 제 선
조천보건지소 공중보건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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