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췌장암으로 투병했던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죽음에 대한 연설을 했다. 졸업식 축사에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라는 어두운 주제였지만 참석자 모두는 잡스의 연설에 빨려들고 있었다. 연설문에서 "저는 1년 전에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주치의는 제게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했을 때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 남았습니다. 죽음이 제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낭비하지 마세요." 의사의 진실말하기가 잡스에게 남은 여명을 소중하게 누리고 정리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자율성을 지켜주기 위해 해야 할 일중에서 가장 힘들고 곤혹스러운 것이 진실말하기일 것이다. 말기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에게 환자의 병과 진행 상태에 대해 알려주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동양적 사고에 젖어 있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에서는 더 더욱이 힘든 일이다.

일본 내과의사 야바자키 후미오는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진실을 감추어 왔던 모습에서 진실을 말해주는 의사로 변해가는 자신의 아픔을 적고 있다. 그동안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진실말하기를 하지 않고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알아왔던 의사나 환자 가족들의 통상적인 사고를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진실감추기는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기 암환자에게 불치병이라는 이유로, 어차피 치료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쌍하다는 이유로, 의사나 가족의 판단만 갖고 환자에게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환자에게 병명과 상태를 숨기고 진실말하기를 하지 않는 것은 '자기결정권'이라는 소중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환자가 올바른 정보를 근거로 자신이 직접 판단하고 결정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진실말하기를 하지 않을 때 많은 말기암 환자들이 때로는 거짓된 격려에 일시적으로 위로를 받지만, 곧 의사들의 거짓 설명과 악화되는 자신의 병세의 큰 차이에 심한 불안을 느끼게 된다. 결국 주위 사람들을 더욱 불신하면서 배신감과 소외감을 가지고 서서히 죽어 간다.

진실감추기는 말기 환자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 가족과 격리되어 중환자실에서 의미없는 심폐소생술과 강심제를 맞아가며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용서를 받고 용서해 주고 가야만 하는 소중한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진실감추기를 하는 것은 환자의 인생을 모욕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환자에게 주어진 너무나 귀한 시간과 기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진실말하기는 말기 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정리할 시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진실말하기를 통해 소중한 자신의 남은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35세의 유방암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외로운 중환자실 대신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삶을 마감하는 것을 택했다. 숨지기 12시간 전에 부모님들에게 어린 아들을 남기고 먼저 가게 된 것을 사죄하고 나서 아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아들에게는 "넌 나의 보물이야.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을 테니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건강해야 돼"라고 말했다. 동료들에게는 만나서 기뻤고, 모두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어서 자신의 인생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의사의 진실말하기가 그녀에게 마지막 삶을 정리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인간답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진실말하기를 익혀가야 한다. 진실말하기는 환자에게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고 의사를 의사답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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