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이미 누리고 있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어떤 것일까?

구소련에서 수십 년간의 억압 시절을 경험 한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금지된 문학작품, 영화, 연극 등의 정보공개)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사회주의 개혁정책)를 펴고 소련 국민들에게 자유와 특권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긴장한 군부와 KGB(국가보안위원회) 등은 고르바초프를 감금시키고 억압정책을 선포했다. 군부와 KGB는 국민들이 예전처럼 순순히 억압 정책에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그 판단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억압정책을 선포한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탱크를 에워 쌓고, 군부와 KGB를 물리쳐 버렸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자유가 제한당하면, 그 대상에 대한 이용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기 위해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강렬한 동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독재정치를 취해 왔던 정부가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면 그 자유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만다. 만일 정부가 일시적으로 허용한 자유를 다시 제한하려든다면, 국민들은 온갖 힘을 다해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사람들은 결코 저항 한번 없이 그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유를 누릴 때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매 번 그 즐거움이 너와 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어 준다.

문제는 일관성 없이 자유 허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주어지는 자유는 인생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자신을 '우리'라는 틀에서 외로운 골방으로 내 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의 의료시스템에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문학적 깊은 성찰과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 없이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의료보험제도이다. 약품비와 약국보험을 의료보험제도 안에 포함시킨 정책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어서 버린 대표적인 사례다. 약을 보험제도를 이용하여 너무나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정책실패는 너무나 무거운 짐으로 보험재정을 흔들고 있다. 이미 전체 보험재정의 30% 이상이 약품비로 소비되고 있다. 낮은 약품구입비용 때문에 노인들은 약으로 밥을 대신한다고 말할 정도다. 외국에서는 극빈층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인부담으로 약을 구매해서 사먹고 있다. 일종의 강력한 게이트키퍼(gate keeper)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의료를 하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나오고 있고, 올 연말에 있을 대선의 톱 아젠다로 떠오를 것 같다. 무상의료를 주장하려면 약품비부터 보험 재정에서 떨어낸 후에나 주장해야 실현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감추어 둔 채로 무상의료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국민들을 속이는 일이거나 의료를 황폐화 시키려는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약품비까지 무상으로 지원되는 나라는 공산주의 일부 국가 외에는 없다. 일부 공산주의 국가의 의료 수준과 국민들이 받는 혜택은 너무나 열악해서 비교의 대상이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급격히 상승하는 약품비 통제를 손 놓고 방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최근 대규모 약가인하 정책으로 일시적인 효과를 누릴 수는 있어도 지속적인 효과는 보기가 힘들 것이다. 이제라도 비용과 효과사이에 어떤 균형을 추구할 것인지 정책적으로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보건 분야의 많은 이해 당사사자들 간의 다툼이 유발될 것이다. 거시적 관점을 갖지 못한 채 제각각 자신들을 위한 한정된 파이를 끌어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의 하나가 제약회사와 정부와의 싸움이었고, 의사와 정부와의 싸움이다. 이제 이러한 싸움이 더 많은 자유(값싼 의료)를 바라는 국민과 정부사이에 벌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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