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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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손톱에
뜬 반달이
길동무하던
밤길은
포크레인이
지워버린
반딧불 하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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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가톨릭의대 졸, 가톨릭의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역임.
1998 현대시학 등단

순이. 순수하고 질박(質朴)한 우리의 정서가 육화(肉化)된 이름이다. 마음과 달리 수줍음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힐끔 힐끔 쳐다만 보던 그녀의 손톱 조반월(爪半月, lunula)은 어느새 밤하늘로 환하게 떠올라 공연히 달만 바라보며 내는 말 “달이 밝네요.” 하얀 달빛 가득하고 반딧불 반짝이던 길. 제작 회사의 이름이 이젠 땅이나 흙 따위를 파고 깎는 굴삭기의 일반 명사가 되어버린 포클레인(Poclain)이 문명과 편리의 다른 이름으로 헐고 새로 고쳐, 이젠 낮보다 밤이 더 환한 길. 풀 자라고 나무 숨쉬는 소리보다 기계 작동 소음이 더 익숙해진 도시의 밤길. 우리네 진료실도 이런 저런 곡절(曲折)로 포클레인이 길을 내고 길옆 살구나무[杏林]도 거의 굴삭해 버린 지 오래인 게 아닐까. 진료실 한 귀퉁이, 진료에 지친 엄지 손가락 세우면 손톱에 슬그머니 내려 앉는 반달. 순이와 함께 걷던 길이 그립다. 길 위의 두근거림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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