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복지부 행보는 건보재정 건실화를 위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과감한 제도 개선을 주문하고 있다. 제약산업에 치명적인 약가 인하를 일방적으로 주문하는 등 의료계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큰 틀에서 의료의 문제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효율성있는 시스템으로의 방향을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최근에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의료기관의 기능 재정립, 일차의료기관의 활성화와 같은 화두들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의료기관의 종별 분류가 이미 법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기능 재정립을 굳이 천명한 것은 실효적으로 제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의료계에 화두가 되고 있는 만성질환관리제는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으로 정부가 일차의료기관의 활성화에 주안점을 두고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으로 보인다.

일차의료기관 활성화라는 화두는 사실 대형병원의 입장에서는 다소 거북한 제안이다.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정부와 의협측에 상당한 압력과 불만을 표했을 것이다. 대형병원과는 당장은 아무런 이해가 없지만(만일 이로 인해 만성질환 환자의 감소가 발생한다면 손해지만), 개원가에는 경제적으로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대형병원의 반발이 예상됐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정부안을 받고 보니 정작 강력하게 거부 의사를 보이고 있는 쪽은 개원가라는 것이다. 이는 이 제도가 개원의를 통제(?)할 수 있는 주치의제도를 연상케하는 선택의원제라는 명칭으로 부터 출발한 것에 기인한다. ‘등록이다, 교육이다’하는 부수적인 장치를 연계함으로써 의혹은 더욱더 증폭되었던 것이다. 결국 개원가의 민심은 정부의 만성질환관리제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강경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미 주치의 제도와 총액계약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장관이 선언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진하게도 그것을 어찌 믿느냐는 개원가의 정서와 만성질환관리제는 분명 주치의제도와 총액계약제의 전초전이 분명하다는 회의론적인 여론에 기인한다. 여기에 신뢰 받지 못하는 집행부의 리더십 부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열악한 개원가의 고통과 분노 그리고 집행부에 대한 불신의 결정판이다. 급기야 회장은 장관을 만나서 전면적인 수정이나 폐지를 건의했지만 명분과 실리면에서 의협회장의 건의를 수용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대답과 정부의 확고한 실행 의지가 있음을 장관으로부터 확인한 것으로 결론 났다. 이에 현재 의료계는 정부의 의중과는 무관하게 대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회원들에게 묻고 있다. 상황을 보면 결국 이 사업은 의료계의 의지와 상관없이 진행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만성질환관리제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나겠지만 문제는 정부와 집행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부가 추가적인 예산 편성까지 고려하면서 제의한 제도가 불신의 골에 빠져서 표류하고 있다. 의정 협의체의 당사자였던 의협 집행부는 주무 이사도 있고 정책연구소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해 적절한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다.

회원들이 반대하니까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모습은 정부와 의료계의 연락책 수준 정도로 밖에 의미를 주기가 어렵다. 의협이 왜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의심케 한다. 집행부야 언젠가 임기가 끝나면 바꾸면 되지만 문제는 정부와 의료계의 관계가 전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계는 언제까지나 정부와 집행부를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찾자는 주장을 하다가는 의료계에서 패배주의자로 매장당하는 분위기도 문제다. 지난 10년간 투쟁만을 외쳤지만 개선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그렇다. 현명한 리더십, 신뢰받는 리더십 그리고 회원들의 이성적인 정서가 아쉽다.

박종훈

고대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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