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개선, 정부가 나서야 한다
8년 전이던가? 의약분업 실시 후 2년쯤 지난 어느 날 늦은 오후, 모 대학병원 외래환자 대기실에서 한 중년남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야 이놈들아! 이게 환자를 위한 거냐? 말 좀 해 봐라 이놈들아!” 중풍에 걸린 늙은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온 50대 중년 남자가 병원진료가 끝난 다음 원외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와 보니 외래환자 대기실에 있던 부친이 의자에 앉은 채 소변을 본 것이다. 중풍에 걸려 말도 잘 못하고 거동도 안 되니까 앉은 채 오줌을 싸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본 중년 아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의약분업 시행 이후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이다.

최근 대한병원협회가 약국 선택권을 환자에게 돌려주자는 전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외래환자에게는 투약처방전을 발행하되 원외약국을 이용할 것인지 원내조제실을 이용할 것인지는 환자의 선택에 맡기자는 것이다. 의약분업 시행 당시 정부가 10년 내에 대규모 조사를 통하여 의약분업의 공과를 평가하고 문제점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의약분업 시행 후 10년 동안 나름대로 의약분업이 정착되었는데 새삼 벌집 건드릴 필요가 있느냐?’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는 것도 병원협회가 대국민 서명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50여일만에 70여만 명이 서명에 동참하였다니 100만 명 서명을 받겠다는 당초 목표는 쉽게 달성될 듯하다.

의약분업이란 의사와 약사가 직능을 분리하여 의사는 처방을, 약사는 조제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의약품 오남용을 막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엉뚱하게도 이미 의사와 약사 간에 직능분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병원에서 외래조제실을 폐쇄함으로써 의약품 오남용 억제와는 상관없이 환자에게 엄청난 불편과 비용부담만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는 그것을 병원과 약국간의 “기관분업”이라고 우겨대지만 세상 어디에도 “기관분업”이라는 형태의 의약분업을 실시하는 국가는 없다(“기관분업”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음).

의약분업이 이와 같이 엉터리가 된 데에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병원 외래조제실을 없애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에 “기관분업” 형태의 의약분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정책담당자의 무책임한 변명일 뿐이다. 어떻게 국가 보건의료제도의 근간을 이해당사자인 의사단체와 약사단체가 (그것도 정작 가장 큰 이해당사자인 병원단체는 빼 놓은 채) 합의할 수 있으며, 설사 양 단체가 합의를 했더라도 어찌 정부가 국가적 막중대사를 이해당사자의 말만 듣고 결정한다는 말인가? 정부는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참고는 하되 오로지 국민의 건강과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재의 의약분업은 정상적인 의약분업이 아니다. 의약분업의 근간은 의사와 약사가 처방과 조제를 분리하여 수행하는 것일 뿐, 이 원칙만 지켜진다면 환자의 불편과 부담을 최소화하는데 정책을 집중해야 한다. 만약 병원에 외래조제실이 있다면 환자는 외래진료가 끝남과 동시에 외래조제실에 들러 조제된 약을 찾아가면 된다. 그러나 현재의 의약분업 하에서는 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다음 처방전을 들고 원외약국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원외약국의 약제비는 원내약국에 비해 1.9배나 비싸다) 조제를 받아야 하니 참으로 해괴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원외약국은 대로변에 있어 주차공간이 없으므로 환자들은 병원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 도보로 원외약국에 가서 약을 지은 후 다시 병원에 돌아와서 차를 가지고 가야 하니 이에 따른 불편과 시간의 낭비는 실로 엄청나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원외약국들이 의사의 처방대로 조제를 하지 않고 임의로 싸구려 약으로 변경하여 조제한 사례가 많이 적발된다는 보도가 있어 국민들을 불안하게 한다. 의사의 처방과 다른 약이 조제될 경우 의사는 환자의 병이 낫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엉뚱한 조치를 취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의 개선을 추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병원계의 다짐과 각오가 필요하다. 병원계에 종사하는 인력만 해도 50만 명인데 이들이 자기의 가족과 친지를 설득하여 10명씩만 서명을 받는다면 500만 명의 서명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선 병원 직원들부터 의약분업제도의 취지와 개선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시켜야 한다. 병원 내의 일부 직종이 의약분업 개선 서명운동에 반대한다는 언론보도가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특정직종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과 직장(병원)마저도 배신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가.

정치권도 잘못된 의약분업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특정단체의 반대 때문에 약사법 개정이 어렵다는 것도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의 편익을 도외시하고 특정단체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정치인이라면 정치를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라도 정부는 잘못된 의약분업을 바로잡아야 한다. 의약분업은 오로지 국민의 건강과 편익 및 국민의료비 등을 고려하여 국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개선해야 한다. 의사와 약사 및 병원 등 이해관계집단의 이해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병원에 외래조제실을 둘 것인가, 둔다면 어떤 형태의 조제실이어야 하는가도 오로지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며, 병원에 외래조제실을 허용하면 원외약국의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등의 주장은 적어도 정부 관계자가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올바른 의약분업을 정착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의약단체나 시민단체의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성익제
전 병협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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