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오래된 제약회사 중에 훽스트라는 회사가 있다. 아스피린을 세계 최초로 합성한 회사다. 독일의 제약역사가 긴만큼 훽스트는 2차 대전 때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제약회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쇠락하여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훽스트 쇠락 원인은 2차 대전에 있다.

전쟁 중 정부의 명령에 의해 독가스와 신경가스를 만든 이력이 전범으로 규정되어 신약개발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기술대국, 경제대국인 독일에 세계 10대 제약회사가 없는 이유이다. 이웃나라 일본도 독일과 사정은 다르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일본 역시 기술과 자본 대국이지만 세계적인 제약회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미국의 화이자가 2차대전 이후에 급성장한 것이나 스위스에 세계적인 제약회사가 생긴 것도 2차 대전의 여파이다. 이와 같이 제약산업은 국제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제약산업은 대부분 나라에서 선호하는 산업분야이다. 높은 기술을 요구 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개발과정에서 파생되는 제품 또한 많기 때문이다. 화학적으로는 제초제나 살충제를 만드는 기술과 약을 만드는 기술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제약산업을 정부가 지원 하는 것은 새로운 약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다. 신약은 효능이 우수하고 부작용이 적지만 가격이 비싸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나라가 의료비에서 차지하는 약값의 비중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약은 일반 공산품과는 달리 자유롭게 유통되지 못한다. 약의 소비 구조가 그 나라 보건의료정책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다른 공산품과는 달리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보건의료정책은 나라마다 달라도 의료비가 남아도는 나라는 없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도 늘어나는 의료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의료비 증가는 나라의 경제 수준과 관계없이 세계 공통의 문제인 셈이다. 또한 의료는 식생활만큼이나 중요한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료에 관한 각국 정부의 태도가 비슷하다. 의료혜택은 늘이되 국민 부담은 줄이겠다는 것이다. 해결방법이 없을 것 같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마술은 약값에 있다. 약값을 줄여서 남는 돈으로 의료혜택을 늘인다면 이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대부분 나라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제약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신약이 국내시장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어차피 수출을 해야 하는데 약이 갖는 이런 특수성 때문에 약의 수출은 일반 공산품 수출과 전략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제약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미래 성장 동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투자에 앞서 왜 이 분야에서 기존의 선진국 이외에 새로이 성공한 나라가 없는지 그 원인을 잘 살펴보고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지 않을까.

김형규
고려의대 내과 교수

의약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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