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번 출근을 해 인계를 받고 오늘도 무사히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던 어는 날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병실순회를 하면서 빈자리를 확인하고, 침상난간을 올리고, 수액속도를 맞추고, 카덱스와 인계로 먼저 만났던 환자를 실제로 만나는 시간.

뇌경색으로 입원한 오른쪽에 마비가 있던 7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생리식염수 수액을 교체하려던 나에게 “그 주사 맞으면 나 걸을 수 있어요? 나 좀 걷게 해줘요. 마음은 걸을 수 있겠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라고 말하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애타고 간절하게 말했다.

나는 간호사이다. 그런데 지금 나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그분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생리식염수 수액이 그저 만병통치약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 맞아요. 이 수액을 맞으면 걸을 수 있어요”라고 대답해 주고 싶건마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환자들에게 수액 주사를 주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항생제 주사를 주고, 먹는 약을 주는 일뿐인가?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라 밤 근무를 마치고 바로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다. 기도를 하는데 할아버지의 눈빛과 말들이 내 머리 속에 계속 맴돌았다. “하느님! 내 곁에 있는 환자들을 긍휼하게 여겨주세요.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분의 아픈 부분을 만져주시고 치유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그 분을 위한 중보 기도를 드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한 보호자분이 간호사실로 와서 큰 소리로 명령하듯 말씀하셨다. “기저귀 좀 갈아주세요”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조금 후에 병실로 들어갔다. 도움을 요청한 그 보호자분은 다리를 꼬고 앉아 환자를 돌보는 것에는 무관심한 태도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가 혹 바빠서 바로 못해드릴 수도 있고, 집에 가서도 계속 기저귀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하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쳐 드릴께요. 다음에는 한번 해보시겠어요?”라고 설명하자, 보호자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환자분의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빼려고 하는 것이었다.

“보호자분! 스크린 치고 장갑도 끼고 하세요. 환자분께서 마비로 한 쪽 몸을 가눌 수 없고 말씀도 못하시지만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갈라면 갈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당신네들은 우리가 뭘 해달라고 해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사람들이야 알아?”하며 언성을 높이셨다.

그 말에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나의 표정에 감정이 실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간호사를 하는 것은 아닌데,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하녀를 다루는 것 같은 보호자의 태도 때문에 간호라는 직업에 대하여 회의감까지 들었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책상에 앉아 있는데, 그 보호자가 나를 보던 원망 어린 눈빛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 없이 해드릴 걸…. 후회가 되기 시작했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섬김 간호를 하겠다고 다짐해 놓고, 일이 바쁘고 힘들면 보호자에게 그 일을 맡기려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난번에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중보 기도를 하던 나였는데, 이렇게 상황에 따라 태도가 바뀌는 것을 보고, ‘난 한참이나 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보 기도로 섬김 간호를 하자고 마음먹었던 내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끊임없이 노력해야겠구나….

눈을 마주치고, 따뜻하게 말하며,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바쁘고 숨막힐 것 같은 업무 속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간혹 인상이 찌푸려지고,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간호사이기에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환자를 대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섬기는 간호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윤정

여의도성모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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