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의사로서 살면서 복잡하고 난감한 윤리적인 문제를 접할 때가 많다. 과연 의사로서 해도 되는 일인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차라리 의료법 등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조항에 만들어져 있다면 해결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진료 중에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들의 상황과 시간, 처해진 조건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법으로만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샤프츠버리(A.A. Coopper Shaftesbury)는 인간에게는 도덕감(moral sense)이라는 고유한 능력이 있어 도덕적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도덕감이라는 능력으로 몇 가지 상황의 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을 접하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막연한 생각은 들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 잘못된 상황을 눈감아 버리거나 그 상황에 타협해버리는 비겁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의사들이 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살아가면서 어렵고 복잡한 일들을 깊이 생각하고 정확한 판단을 한 후 거칠게 저항하지 않는다면 비윤리적인 파도가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이러한 때에 의료윤리의 네 가지 원칙을 대입시켜 보면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되는 문제들의 답을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다. 비첨과 차일드레스가 주장한 생명의료윤리의 네 가지 원칙을 의사들이 접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윤리적으로 무엇이 문제여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그리고 해도 되는 일인지 알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비단 의료현장에서 발생하는 윤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의사로서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많은 상황에 대입해 볼 때 유용한 원칙이 될 수 있다. 드러내기 정말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일부 대학병원에서 전문의를 딴 제자들을 지방병원에 강제로 취업을 시킨 후 매달 수백만원의 돈을 의국발전비용이라는 명복으로 건네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명 ‘옵션’이라고 한다. 아예 전공의를 뽑기 전에 각서를 받은 곳도 있다는 소문이다.

수련을 받고 전문의가 된 제자들은 원치도 않은 직장에 가서 강제로 1년에서 2년을 근무하고, 전문의를 제공받은 병원은 의사를 보내준 의국에 돈을 건네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두렵다.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 의료계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불합리한 옵션을 거부하게 되면 배신자로 따돌리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몰아 부쳐버린다. 이 상황을 의료 윤리의 네 가지 원칙(자율성의 원칙 △악행금지의 원칙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에 대입해보면 무엇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확연히 들어 난다.

일명 ‘옵션’은 먼저 자율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전문의를 취득한 후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자신이 결정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옵션이라는 타의에 의해 직장에 가야 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사고 팔 수 있는 노예가 아니다. 두 번째로 악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제자들이 전문의로서 일한 대가를 의국발전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빼앗는 것은 악행을 넘어 범법행위이다. 세 번째로 선행의 원칙에 위배된다. 의국발전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받은 돈으로 논문연구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열악한 연구비를 메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돈으로 논문을 만드는 것이 과연 선행일까?

마지막으로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남이 일한 대가를 빼앗아 가는 행위는 정의롭지 못하다. 게다가 힘없는 제자의 정당한 보수를 가져간다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이다. 우리는 무서운 비윤리적인 파도가 우리를 덮치려 할 때 용기있게 저항해야만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자. 부끄러운 도덕 불감증에서 당당하게 빠져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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