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나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상황에서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어떤 판단과 행동으로 상황을 해결해 나갈 것인가? 진짜 간호사가 되려면 매순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한다.

서양동화 중에 ‘벨벳토끼’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어떤 꼬마의 장난감 말과 토끼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새로 들어온 장난감 토끼가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물었다.

“진짜는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야.” 말 인형이 대답했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아파야 해?” 다시 토끼가 물었다. “때로는 그래. 하지만 진짜는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진짜가 되는 일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야? 아니면 태엽 감듯이 조금씩 조금씩 생기는 일이야?” “그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야.” “그럼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이가 진정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놀고, 너를 오래 간직하면, 즉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너는 진짜가 되지.”

“사랑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깨어지기 쉽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고 있고, 또는 너무 비싸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장난감은 진짜가 될 수 없어. 진짜가 될 즈음에는 대부분의 털은 다 빠져 버리고 눈도 없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아주 남루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왜냐하면 진짜는 항상 아름다운 거니까.”

진짜 간호사가 되는 과정도 장난감 토끼가 진짜 토끼가 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힘들고 지치고 가슴 아픈 순간이 수없이 많겠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너무 냉철하여 환자나 보호자가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하거나, 환자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하여 자신을 낮추지 못한다면 진짜 간호사가 될 수 없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간호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6년간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용하기 어려운 여러 상황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그 사람들 못지않게 나도 소중한 사람인데 ‘왜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늘 나를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내가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려놓은 참된 간호사의 모습이었다.

간경화로 병원 입원이 잦은 중년의 환자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환자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담당 주치의와 나는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출혈은 점점 심해져 응급 시술을 위해 내시경실로 옮겨졌다. 수혈 준비를 위해 함께 동반했던 나에게 환자는 애처러운 눈빛과 함께 “살려주세요”하고 호소했다.

그 한 마디에는 삶의 많은 회한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순간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졌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나머지 15명의 환자들과 미뤄져 있는 많은 업무들,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 긴박한 상황의 환자…. 선택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졌다. 응급상황으로 일손이 부족한 내시경실에서 내 몸은 이미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환자는 지혈술을 무사히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지만 며칠 후 주치의에게서 환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출혈이 있던 날 밤 밀려있던 업무를 처리하고 새벽에야 퇴근했지만 환자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픈 마음을 조금은 어루만져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알콜성 간경화로 입원 중이던 환자였는데 보호자와 주치의가 면담하는 사이 간성혼수로 혼자 병원 밖으로 나가 입구에서 쓰려져 응급의료센터로 옮겨진 것이다. 담당 간호사였던 나는 응급의료센터로 내려가 환자 상황을 살폈다.

머리를 부딪혔는지 열상이 보였고 그 와중에서도 밖으로 나가겠다고 막무가내 셨다. 보호자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고 병동 환자라 응급센터 간호사 또한 돌봐줄 여력이 없어 나는 모든 일을 미뤄두고 환자와 함께 했다. 다행히 환자는 검사 후 뇌에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결과를 듣고 늦은 밤 병실로 올라왔다. 그 날도 나는 새벽에 퇴근해야 했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내과 주치의 한 분이 일을 하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소화기내과 선생님이 간호사분을 칭찬하시더라고요. 지난번에 출혈환자 내시경실에서 지혈술 할 때 끝까지 남아서 도와주셨다고 너무 감동받았다고 했어요.”

뜻하지 않은 칭찬에 기뻤다. 그간 내가 해 왔던 간호가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도 내가 담당하는 환자분들이 나를 진짜 간호사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우리 담당 간호사가 제일 친절해.” 아직 나는 진짜 간호사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짜가 되는 그 날까지 나의 소중한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사랑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김미희

여의도성모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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