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뒤 언저리에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다가온다면…. 나는 누구를 위하여 감사드리고, 누구의 손을 살며시 잡고, 내가 하는 일이 즐겁고 행복했노라고 기도 드릴 수 있을까?

숨 막힐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 시간만 더 있어도 주어진 일과가 이렇게 바쁘지는 않을 텐데하고 생각하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 기쁨이고 따뜻함일 수 있었을 런지 돌이켜 보게 된다.

짧은 시간동안의 환자들과의 대화와 나 자신의 욕구 사이에서 상충되는 모순은 없었는지 자문을 해본다.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 병원이라는 직장의 특수성으로 인한 긴장감들이 어느새 내 얼굴의 미소를 반쯤 잘라먹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늘 바쁘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병원 업무에 진정으로 가슴에서 우러나는 간호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근무시간 내에 맡겨진 업무를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인계를 받게되는 다음 간호사에게 일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환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여유조차 없이 일을 한 것만 같다.

어느 해 겨울의 일이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예민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 환자가 있었다. 그 날도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병실에서 모든 환자들이 들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병원이 하도 오래 되서 건물도 시설들도 다 낡았어. 병원비가 싸기를 하나,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라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불평불만을 듣고 있자니 약간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한 두 번 반복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 환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날도 어김없이 환자와의 대화 없는 침묵 속에서 처치를 했다.

그런데 문득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딱히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세월의 뒤안길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동자, 신체적 고통에 너무 힘들어 축 쳐져있는 어깨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 왔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000할아버지, 저녁은 드셨어요? 병원에 오래 계시니까 좀 따분하고 지겨우시죠? 그래도 할아버지가 말씀도 많이 하시고 활기차시니까 병실 분위기가 밝은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바빠서 신경을 못 써 드린 것 같아 죄송해요.”

이 말을 건네 놓고 할아버지의 대답이 나오는 그 몇 초간이 몇 년처럼 그렇게도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혹여나 괜한 말을 꺼내 할아버지 기분을 도리어 상하게 하는 건 아닌지, 혹은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는 건 아닌지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할아버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늙은이가 시끄럽다고 놀리는 거유? 내가 목소리가 좀 크긴 하지. 그래도 이 병실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으면 재미있다고 웃는 다우”하며 껄껄껄 웃으시는 것이었다.

한 여름 내내 울어대던 매미가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아 그동안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한 겹의 허물을 벗어버리듯 착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불평불만 가득한 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최신식의 건물과 병원시설들, 의료진의 뛰어난 의술도 아닌, 간호사 혹은 다른 의료진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진심어린 대화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께서 마지막 퇴원하실 때 내게 남겼던 그 한마디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간호사, 복 받을 거유”하며, 툭 내뱉듯 던지며 가버리신 할아버지는 참 고마웠다. 덕분에 건강이 잘 회복되어 나간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그랬듯 그렇게 할아버지도 내게 진심어린 말씀을 건네신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일이 있은 후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고 관심을 보이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은 큰 돈이 드는 일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냥 짧은 시간 조금만 더 마음을 내어 큰 관심이 아니더라도 “박00님, 오늘은 얼굴이 좋아보이세요.” “김00는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세요”라며 한마디의 인사를 건넬 때 진정한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인간관계에서 관심과 배려는 항상 짐이 되지만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말 한마디가 환자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의욕의 디딤돌이 되어 섬김의 간호를 할 수 있는 사명감을 되새겨 본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는 행복이라는 말뚝이 사랑이라는 가슴에 꾹 눌러 박혀있을 때 보석 같은 관계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통의 미학’을 되새겨 본다.

이지현

여의도성모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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