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명이비인후과의원장

진료를 하다 보면 의사의 역할이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 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것의 기준은 의학적 기술이 아닌 윤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학 기술로 환자를 치료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으면 그 기술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해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불법 장기이식 수술이다. 언제든 돈만 준비되면 비행기를 타고 가서 신장이나 간이식을 받고 돌아온 사례를 보고 있다. 힘없는 약자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어느 단체나 개인이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방법을 택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택한 방법이 윤리적으로 합당하고 정의로운 방법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기준을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러한 행동이 신문이나 방송에 나왔을 때, 스스로 떳떳한지 아닌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을 ‘대중성 법칙’(publicity rule)이라고 한다. 또는 뉴스페이퍼 테스트(news paper test)라고 하기도 한다. 어느 단체나 개인이 택한 선택이 오늘밤 두발을 뻣고 잘 수 있을 정도로 거리낌이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황우석 사건은 생명공학이 가져다 줄 잠재적 이익이 크다고 판단되더라도 그 연구방법과 거짓말을 한 비윤리적 행위를 인해 절대 인정해 줄 수 없다. 한 마디로 무의미한 연구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비윤리적인 연구는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본인은 인체 대상연구의 가장 대표적인 윤리기준이 제시되어 있는 ‘헬씽키 선언’(Declaration of Helsinki)을 몰랐다고 변명을 했다. 이는 너무나 무지한 연구자의 자질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안 하면 다른 나라에서 할 텐데 문제가 있더라도 서둘러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윤리라는 단어는 안중에도 없고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식약청에서 황우석씨가 요청한 연구결과를 인정해 주지 않고 반려한 사건이 있었다. 정말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다. 만약 식약청이 황우석씨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면 우리나라 연구논문들은 외국잡지에 한편도 실리지도 실어 주지도 않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 의사협회에서 일어난 고소 고발 사건들도 법원의 판결을 보아야 정확하겠지만, 현 회장이나 그 반대그룹이나 모두 함께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각 자의 선택한 행동이 윤리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부분들이나 정의롭지 못한 방법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성실히 의협을 위해 열심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의료계를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하는 고전적 공리주의적 접근법을 택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전적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는 심각한 윤리적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악한 수단이 합리화된다는 점이다. 후배들의 눈에 비친 우리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았으면 한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런 사고와 윤리의식에 만족하고 살아온 우리 자신의 문제가 노출된 일이다.

의사로 살아가면서 윤리의 기준을 세워 놓고 벌어지는 상황을 그 기준에 맞추어 생각해 보면, 어지럽던 답이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동안 결론을 못 내고 답이 없어 보이던 부분들이 환하게 다가온다. 윤리는 의사들이 이루어 나가야 할 개혁의 나침반이고 희망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