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어느 날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하라는 연락을 받고 설레는 가슴으로 출근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다른 선생님들이 병원에서 보낸 시간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에 불과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만나온 수많은 환자분들을 간호하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떠오른다.

언젠가 내가 학생 때 교수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있었다. “환자한테 내가 정말 진심으로 대하면 그 환자도 나의 진심을 알아준단다. 예전에 내가 임상에 있을 때 한 백혈병 환자가 있었는데 그 환자는 내 결혼식에도 와줬어. 예쁜 꽃병도 선물해 줬지. 그 꽃병은 아직 우리 집에 잘 있어. 그렇지만 그 환자는 이 세상에 없단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도 환자 한분 한분에게 최선을 다하는 간호사가 되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대장암 수술 후 퇴원했다가 복부 통증으로 다시 입원을 한 환자분이 있었다. 그 환자분은 아플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며 진통제를 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환자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진통제를 달라고 계속 재촉을 해서 마음이 힘들었지만 내 가족의 일이라면, 또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을 해보니 얼른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통제를 맞아서 좀 괜찮아지면 그제야 잠이 들곤 했다.

환자분은 점점 좋아졌고, 나도 그 환자와 많이 친해져 처음에 불편했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 환자는 내가 병실에 들어갈 때 마다 먼저 말을 걸어주시고, 내가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 “밥은 먹었냐”, “정 간호사는 환자들을 끌어 모으는 재주가 있다”며, 그래서 바쁜 거라고 위로도 해주셨다. 그런 환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스스로를 재촉하며 일하고 있는 나에게 여유를 가져다 주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그 환자는 회복이 되어 퇴원했다. 인사를 잘 못하고 헤어져서 항상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던 어느 날 주말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 간호사!”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 환자와 보호자가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어쩐 일이세요?”라고 여쭈어 보았다. “항암 치료 받으러 왔어. 7층에 입원했어. 근데 정 간호사 생각이 나서 이렇게 보러왔지!”

보호자 말로는 날 봐야 한다며, 10층으로 가보자고 계속 재촉을 하셨다고 했다. 너무 감사했다. 퇴원하고 나서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잘 해드린 것도 별로 없었는데 날 찾아와 주시다니, 너무 반갑고 감사한 마음 뿐 이었다.

누군가 가장 절망적이고 두려운 순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고마운 한 사람으로, 가끔은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따뜻한 일인가?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간호사로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원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맡은 환자들에게 항상 그리운 사람으로, 보고 싶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간호사가 되어야겠다.

정차은

여의도성모병원 간호사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