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영광은 어디로

김일훈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러시아 관광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세계 제1가는 궁전, 사원 그리고 박물관 들이며 크렘린이 그 으뜸이다. 고색창연한 크렘린 내 사원 지붕은 항상 금색으로 번쩍거린다.

헌 군복차림의 한 군인이 사냥매(Eagle) 한 마리를 손에 들고 있다. 이 사냥매는 뭇새들이 금색지붕을 손상치 못하게 감시하는 파수병 노릇을 한다. 그러고 보니 그 근처에 보통 새들이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이 군인은 매와 함께 사진찍으라고 권하며 뭣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차마 군복 입은 자에게 돈을 건네 줄 수는 없었다.

저녁에 크렘린 광장에 가 봤더니 입구 군인 막사에서 백명쯤되는 사병들이 대열을 지어 어디론가 간다. 허수룩한 군복 차림에 외국인들 앞에 풀죽은 얼굴들! 6. 25때 핫바지 저고리 같은 군복에다 맥빠진 한국군인을 연상시켰다. 군력이 국력을 상징하는 것일까.

러시아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사원(寺院), 즉 러시아 정(正)교회는 혁명후 모두가 폐쇄되어 박물관이나 고적지(古蹟地)로 전환되었는데 종교가 자유화된 지금 새로 문을 열어 예배 보는 곳도 여러 군데 있다고 한다.

현 정부에서는 모든 사원을 교인에게 개방했으나 교인수도 적거니와 건물 수리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 문닫은 곳이 대부분이다.

웬만한 고을마다 기념비처럼 우뚝 솟은 사원이 있지만 가까이 가 보면 너무 낡고 심지어는 건물이 기울어진 곳도 있으며 출입이 금지된 안을 들여다보면 침침한 고물창고 같았다.

제정시대 종교도시로 이름난 놀보크에서 크게 공사중인 사원이 있었는데 그곳 교인들의 헌금으로 건물을 재건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쯔아(제정러시아)때 국가보조로 유지했던 호화찬란한 사원은 왕족과 귀족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기둥이었다.

러시아정교는 피곤하고 희망 없는 농민을 달래어주는 진정제였고 사원은 그 들의 위안처였다. 그래서 혁명정부의 레닌은 “종교는 아편이다”고 모든 사원을 폐쇄해버린 것이다.

모스크바의 수도원 학교에서는 장차 문을 열 많은 정교회에 대비하여 수도사교직자 등 목자를 양성하고 있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마침 주일이라 천주교 미사 같은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신자들 중에는 예상과는 달리 젊은 세대도 많이 있었다.
미국이나 서울의 교회에 나가면 모두가 밝은 얼굴로 “참으로 감사합니다.”고 기도하는 분위기인데, 이곳에서의 느낌은 “주여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살게 해주십시오.”하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선입견에 소련사람, 러시아사람 하면 노동자나 ‘보드카-술 쟁이’같은 붉은 얼굴이 떠오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백설 공주를 연상시키듯이 피부색이 아주 흰 미녀들이 많다. 호텔 로비에서 희디흰 미녀가 있어서 자주 쳐다보았다.

물론 환자를 보는 의사나 얼굴윤곽을 관찰하는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보았는데, 이번에는 여자 쪽에서 이쪽을 보더니 접근해 오려는 기색이다.

입장곤란해서 재빨리 다른 곳으로 갔다.

자유의 물결을 타고 이 나라에서 급성장한 것이 매춘과 각종 범죄란다.
강력한 통치법만 있었지 도덕률이나 종교관념이 없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개방되었으니 있을 법도 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사회주의 천국에서 마피아와 에이즈 지옥으로 전락했다”고 공산당 간부들은 현실을 비난하고 나서는 것이 아닐까.

러시아화폐 ‘루블’은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사람들은 그들 돈과 루블을 교환 하지 않으려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소련붕궤 후인플레가 몇10배나 올라 내일의 루블 가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음료수 살 때나 변소출입 할 때 잔돈이 필요해서 호텔내 화폐교환소에 갔더니, 쉬는 시간이라 문이 잠겨있었다.

그 근처에서 눈치보고 있던 러시아청년이 돈 교환해주겠다고 조른다.
러시아서는 이러한 외국돈의 암거래(暗去來)가 곳곳에 성행하고 있으며, 웬만한 상점에서는 달러로 지불하는 것을 대환영한다.

크레믈린 광장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볼쇼이’극장 앞 광장에는 행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외국인을 상대로 선물에서부터 외국제 상품 등 러시아인을 위한 생필품을 파는 암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루블의 종이쪽지화와 암시장의 성행은 자유경제체재로 전환한 러시아의 경제파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련이라는 역사적거물의 붕괴는 피를 보지 않고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그것이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니 경제파탄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세계제일을 다투었던 초강대국은 스스로의 체제를 청산하고 패전국의 폐허된 땅에 세워진 초라한 암시장을 연상케 하는 원초적인 경제체제로 전락한 격이니, 그 책임이 공산주의나 독재정치나 또는 ‘페레스트로이카’이거나 간에 그 결말은 이렇듯 허무한 것이다.

소련붕괴를 환영했던 다수국민이 원했던 바는 서구적인 유토피아였지 이러한 후진국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러시아는 옛날의 위대함을 되찾으려는 경향마저 돋보인다,
위대한 러시아를 부르짖던 ‘피터대왕’이나 ‘레닌’이 다시금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입증이나 하듯, 지난번 러시아 지방선거에서 국수주의자들이 압승했다. 일차대전 후의 독일의 전철을 밟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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