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의 첫 시작은, 1월 22일 간호사 국가고시와 함께 시작되었다. 지난 4년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날임과 동시에 앞으로 간호사가 되기 위한 진정한 첫 걸음을 내딛는 날이기도 했다.

그 땐 왠지 국가고시만 합격하면 바로 간호사가 되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 후 끝을 알 수 없는 웨이팅이 시작되었고, 병원에서 언제 전화가 올지도 모른 채 그 동안 미뤄왔던 영어공부도 시작하고, 남는 시간에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가족, 친구들과 함께 가까운 곳에 여행도 다니며 입사 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유를 만끽했다.

큰 용기를 내어 혼자 떠난 여행은 기대와는 다르게 막막한 상황이 여러 번 닥쳤다. 아무도 없는 나 혼자인 상황에서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건내야 하고, 내가 스스로 먼저 한 발 내딛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순간들이었다. 처음엔 어렵고 힘들기도 했지만, 여러 번 부딪쳐 보니 이러한 상황들도 점점 익숙해지고 용기와 자신감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다 해도 지난 여행을 통해 배운 것들은 지금 신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 나는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추석이 지나고 얼마 안 됐을 즈음이었다. 병원에서 손 위생 모니터링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한 나에게 어느 날 2258로 시작되는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2258이 뜨는 순간 나는 “아, 왔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발령 전화로 당황스러웠지만, 더 당황스러웠던 건 바로 내일 모레부터 출근이라는 사실이었다. 몇 달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반가운 소식에 나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네, 출근하겠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대답했다. 실습 때 수술실을 경험한 이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던 수술실에 대한 나의 간절한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의 꿈과는 매우 달랐다. 발령 후 첫 2주 옵저베이션 기간 동안 신규 간호사인 나는 수술방 안의 공기와 같은 존재였다. 분명히 내가 수술방 안에 있긴 하지만 아무도 내가 수술실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마치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것 처럼….

그 후 첫 방으로 27번 방을 배정받고, 차근차근 수술실 간호사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그 곳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언제나 나를 관대하게 지켜봐주신 방장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부족한 나의 성장을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그 믿음 속에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을 수 있었다.

내가 아직 한 명의 간호사로서의 몫을 못해낼 때 였다. 원래 신규가 있는 방은 3명이 멤버가 되어야 하는데, 그 날 따라 멤버가 부족하여 나와 방장선생님 둘이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기구 이름도 다 못 외우던 나는 긴급 단독 스크럽을 서게 되었다.

나는 떨리지도 않았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날 방장 선생님은 스크럽과 서큘레이팅, 거의 두 사람 몫의 일을 하신 거와 다름없었다. 방 배정 받은 지 이제 겨우 1주일 된 나를 혼자 스크럽에 들여보내고, 방장 선생님은 밖에서 얼마나 아찔하셨을까. 그 날 나는 선생님의 ‘아바타’가 되었다. 방장 선생님은 수술상 바로 옆에 서서 “이거 내고 다음엔 저거 내라”하면, 나는 이걸 준비하고 저걸 준비할 뿐이었다.

많이 힘드셨을텐데도 나를 가르쳐 주시고 이끌어 주려고 애쓰시던 그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아무런 말없이 손만 내미는 오퍼레이터에게 원하는 것을 쥐어주며 뿌듯함을 느낄 때도 있다. 그 날과 비교하면 정말 ‘내가 크긴 컸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힘들 때도 많다. 7시에 출근해서 9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날도 있었고, 다른 교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가우닝을 했는데, 이유도 모르고 “야!”라는 말을 들었던 적도 있다. 밥도 제때 못 먹는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나에겐 8명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동기들이 있다. 방 마다 다른 수술 스케줄 때문에 모두가 함께 모이긴 너무나도 어렵지만, 같이 모였을 때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건 이 친구들 밖에 없다. 서로 힘든 얘기에 깨알같이 공감해 주고 힘이 되어주는 동기들! 너무나 고마운 친구들이다.

어떤 수술실 선배님은 “수술실 간호사는 nurse가 아니라 technician”이라고 얘기를 하기도 한다. 매 순간 많은 수술 기구 세트와 장비, 복잡한 수술 procedure 앞에서 대학 4년간 가졌던 간호사로서의 ‘identity’는 잊혀져 버릴 때도 있지만, 학교에서 배워온 지식들 뿐만 아니라 수술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환자의 가장 위험한 순간에 함께 하는 수술실 간호사야 말로 누가 보아도 매력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사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더 많은 신규 간호사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는 순간을 기대하며 앞으로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김복진

서울성모병원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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