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은
여의도성모병원 간호사
“어이구, 빵점이 왔어?”
출근한 나를 반겨주시던 임할머니의 인사말.

환자분들에게 통증 점수를 묻곤 할 때마다 기억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다.

임할머니를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난다. 주말 오전 9시부터 이실을 받아야 한다는 연락이 왔었다. 대퇴골 골절로 수술 후 절대안정을 요하는 고령의 할머니이며 수술부위가 감염이 되었고, 산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오전 9시라 내가 해야 할 정규업무를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급하게 이실을 받았다.

‘이렇게 일찍 이실을 받아야 하나? 할머니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욕창 생길 수도 있으니 잘 봐야겠네. 할머니 혈관도 없어 보이는데 수혈할 예정이라는 말도 나오고. 손이 많이 가는 환자분이 오시는 구나’

참으로 부끄럽게도 처음엔 이런 생각부터 먼저 들었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간호하는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내게 섬김을 깨닫게 해주었다.

암성통증 환자들을 비롯하여 정형외과 수술을 한 환자들에게 매 근무 시 마다 통증점수와 양상에 대해서 묻는다. 개인이 느끼는 통증 점수를 말로 표현하도록 하고, 이에 따라 적절한 통증조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매 근무별 통증 점수를 묻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아픈 게 아픈 거지 어떻게 아프냐니? 얼마나 아프냐니 그걸 어떻게 말해?” 라고 말하시는 환자분들에게는 하나씩 설명해가며 물어본다는 것이 힘들고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할머니, 지금 수술한 다리 아프신 게 빵점부터 백점까지 중에서 얼마나 되요? 많이 아프시진 않으세요?” 처음에 할머니는 통증점수를 묻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시지 못하셨다. 하지만 의료진의 치료와 우리들의 간호를 받으시면서 할머니는 점점 좋아지는 모습을 보이셨다. 웃으시면서 맞아주고 식사도 잘 하셨다.
어느 날 어김없이 할머니에게 통증점수를 물었다.

“빵점이야”
“할머님! 지금 빵점이세요? 하나도 안 아프세요?”
“응. 안 아파 빵점이야.”
“지금은 백점. 백점”

혈관이 약하신 할머니에게 항생제를 주사를 할 때마다 아파하셨다. 항생제를 주사할 때면 당신이 지금 백점만큼 아프다며 점수를 말씀해 주셨다. 처음과는 달리 자신의 통증을 점수로 말할 수 있게 되니 더 적절한 통증조절을 해드릴 수 있었고, 또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나아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었다.

그러나 수술 부위가 호전되지 않아 재수술을 받게 되셨다.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우리 병동으로 다시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를 보면 이번에도 빵점이라고 맞아 주시겠지?’ 라는 반가운 마음으로 할머니에게 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꼭 감은 눈과 찡그린 얼굴로 계셨다. 그 뒤로도 가족들이 찾아올 때나 할머니의 눈 뜬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었다. 통증 점수를 물어도, 아프시지 않냐고 물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어 다른 요양병원으로 전원을 가게 되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지금 빵점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지 못하고 보내드리게 된 것이 너무 안타깝고 잘 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루 하루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일하다 보니 어쩌면 통증점수를 묻는 것과 같은 직접 눈에 보이지 않고 조금 작게 보이는 일들은 쉽게 간과해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처음에 통증점수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는 반복해서 설명해야하고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것 같아서 답답하고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것이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작은 일들이라도 모두 환자분들을 잘 돌보고 섬기기 위한 중요한 한 가지임을 알게 해주고, 처음 마음을 잃지 않고 일 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신 감사한 분이다.

오늘 하루도 나는 다짐한다. 나의 간호를 받는 이가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간호하고 섬기겠노라고,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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