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룩한 러시아 -

넓고 크다 뿐이지 어딘지 모르게 허수룩하고 처량한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와 피터스 버그만은 체면을 갖춘 세계적 도시로 옛날의 영화로웠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곰보 분칠한 격으로 외모만은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춘 곳이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건물도 구석구석이 낡고 손상된 곳이 많으며 돈이 없어서 수리할 수 없다고 한다.

호텔이나 식당 서비스도 거의 낙제점이다. 공산당 시절 “실업자가 없지만 할 일도 없다. No Unemployment, No Work”라는 현상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월급 100달러가 평균수입이라니 그 돈 받고 일이나 서비스를 잘 할 엄두도 낼 수 없겠다. 그런데도 러시아인은 1970년대 한국처럼 잘 사는 사람의 수준은 높다 한다.

크레믈린 근처의 GUM이라는 대형백화점엔 서방 고급상품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데 신흥 갑부들이 그 고객이라고 한다. 중류층의 생활비가 약 500달러 정도인데도 월급 100달러로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현(1990년대) 러시아의 미스테리 첫 번째에 속한다고 안내자는 말한다. 즉, 나머지 400달러는 moonlight(부업), moonshining(밀주), black-marketing(암시장거리), bribery(수뢰) 등의 부수입으로 충당한다고 안내자는 자학적인 어조로 설명한다.

국제화와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신진 한국의 모습도 이곳 대도시에서 볼 수 있다. 대우, 삼성의 큰 간판이 중심가에 크게 눈에 띄인다. 모스크바 강을 크루즈 하다 보면 이름난 한척의 선박이 호텔로 개조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는데, 그 호텔 간판이 Silla로 적혀 있어 한국계(신라)임을 알게 된다. 명소마다 붐비는 관광객중에 한국인을 자주 만날 수 있어 흐뭇했다. 러시아에 골프장이 몇이나 있는가 알아보았더니 통털어서 모스크바 근교에 하나밖에 없으며, 그것도 일기관계로 연중 3개월만 문을 여는 적자 기업이란다.

잘은 몰라도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그를 위해 급히 만든 골프장일는지도 모른다. 아세아의 개발도상국 도처에 외국자본이 번창하고 외국상사원들이 붐비는 골프장들이 많은데 러시아만은 예외다. 그만큼 외국기업의 진출이 늦고 장사가 잘 안된다는 말도 된다.

내가 자본주라도 이곳엔 투자 않겠다고 옆에 있는 미국인 노교수에게 말했더니 “사실이다”고 동감한다.

아무리 땅이 넓고 인력이 싸서 투자에 호조건이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인력의 성분이니 말이다. ‘No Work’란 전통을 가지고 일하기 싫어하는 그들을 무슨 재주로 부려먹는단 말인가. 그리고 ‘코-케이션(서양인종)이다’ ‘대국인이다’하는 허풍같은 자존심만 살아 있는 그들이니 말이다.

러시아인은 과거 몇 백년간 장사해 본 경험이 없다. 국가간의 교역이란 것도 민간차원에서 해본 적이 없고, 또 국가에서도 교역보다는 ‘다와이’정신으로 약육강식으로 주변 약소민족이나 국가에서 약탈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듯 상술도 없고 장사경험도 없는 그들이고 보면 조속한 경제부흥을 기대하기란 ‘나무에서 고기를 잡는’ 정도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공산당 시절의 통제경제에 향수를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때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럭저럭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으니 말이다.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중국의 경제개발이 성공적인 것은 중국인은 원래 장사술이 뛰어난데다가 강제적이긴 하나 정치적으로 안정된 바탕 위에 시장경제 개발을 해나가기 때문이라고 쓴 논설을 읽은 적이 있다.

피터스버그의 주택가를 동료들과 함께 밤 구경을 해봤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곳이 있다는 근처를 돌아볼 때 너무나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밤거리라는 걸 알고 놀랐다. 모기가 쉴새없이 덤빈다. 외국인이 출입하는 도시인데도 구충제를 공중 살포하는 일이 없는 듯 하다.도대체 초저녁부터 잠자는지 아무튼 그들은 바깥 외국인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두문불출이다. 그만큼 밤거리의 오락이라는 것도 없고 밤의 세계에 흥미가 없다는 말도 된다.

서울은 물론 북경이나 미국 대도시에는 못사는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벌떼처럼 모여들고 붐비는데, 러시아 도시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좋은 곳 찾아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의욕도 없는 듯하다.

러시아에는 고속도로라는 것이 따로 없고 국가의 간선도로가 미국 시골길보다 못하다. 모스크바에서 서방으로 통하는 길이나 피터스버그로 가는 길은 나라의 으뜸가는 간선도로 일텐데도 모두가 1차선이고 차선 밖 부분이라는 것도 없다. 그나마 포장도로인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보수공사가 안되어 차가 심하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들의 주된 교통편은 기차인 모양이고, 자가용이나 버스 교통수단은 극히 드문지라 장거리 도로이용은 주로 화물차이고, 이것은 옛적에는 군용차였을 것 같다. 1차선 고속도로고 보면 차 사고가 났다하면 박치기하는 ‘즉사 사고’가 많다. 미국의 교통사고 즉, 차체파손(Fender bender)과는 거리가 멀다.

모스크바에서 폴란드 가는 길에 처참한 대형사고를 둘이나 목격했다. 도로 연변의 공중시설(변소, 식당)도 전혀 없다. 간선도로엔 약 50km 거리마다 30m 가량의 ‘차선 밖 부분’(Shoulder)이 있어 용변을 하려면 그곳에 차를 세운다. 러시아 차장이 웃으면서 “이것이 러시아 변소랍니다”고 한다. 도로변 오른쪽 길은 남자, 왼쪽 길은 여자용으로 한참 풀 속 길을 걸어 숲 근처에 가서 일을 치룬다.

칸막이 같은건 물론 없다. 되돌아보니 멀리서 원격조정해 이쪽 사진 찍는 짖궂은 친구도 있다. 그러니 여자들은 응급이 아닌 한 가급적 참는다. “뱀이 없는가?”고 물으니 “독사는 없다”는 대답이었다. 식사는 몇 시간 달리다가 조그만 도시가 나타나면 부근 식당에 들어가서 한다. 식당이나 백화점의 변소는 냄새는 물론 더럽기 그지없고, 그것도 노인들이 입구에서 요금을 받는다.

서구라파는 ‘유럽 공동체’라고 해서 서로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는데 반해, 육로로 러시아를 출입하는 수속은 너무나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공항 출입은 좀 나은 편이지만 예사로 몇 시간씩 연발하는 비행기 시간을 계산에 넣으면 마찬가지다.

핀란드에서 러시아에 상륙해서 입국할 때는 낡은 건물 안에서 모기에 뜯기면서 여권통과 하는데 무려 1시간이나 걸렸다. ‘007 영화’에 나오는 여자를 닮은 중년 여자 검사원이 옆눈으로 흘겨 보는데, 알고 보니 비자 사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는 것이다. 일본말에 형사를 ‘옆눈쟁이(橫目)’라고 하는 것이 실감났다. 이러한 것이 러시아 입국의 첫 경험이니 인상이 좋을 리 없다.

러시아에서 폴란드 쪽으로 출국할 때는 관광차, 자가용, 트럭 등이 100m 이상 긴 줄을 지어 통관검사를 기다리는데 4시간이 걸렸다. 관광차를 우대한다는 것이 그 정도이며 일반차량 통관은 예사로 하루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 관광차는 여러 군데서 족보에 없는 요금을 지불해서 통과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급행 수수료지만 명목은 환경세, 과속 벌금 등 이라고 한다. 이러한 돈은 공무원들의 후생비가 되는 모양이다.

폴란드 입구에 들어서면 반대 방향에서 러시아에 입국하려고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는 수백개의 고물 자동차가 눈에 뛴다. 서방에서 폐물화된 차나 훔친 차를 러시아에 끌고 가서 그곳에서 손질해서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도난당한 고급차들이 마피아같은 조직 루트를 통해 러시아로 밀수출 된다는 뉴스를 들은 바 있다.

거리에 거지들이 너무나 많다. 알코올 중독자들이니 동정할 여지가 없다고 안내자는 말한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어린이 둘을 껴안고 애걸하는 모양은 애처로웠다. 길가에 작은 악단을 마련한 곳에 모인 구걸꾼들, 가난한 예술인의 술값 벌이 일지도 모른다.

모스코바에서 머물었던 큰 호텔은 누가 주인인가 물어보니, 지방정부 주식 50에 민간인 주식 50이라며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모두가 주주이거나 그들의 인척이라고 한다. 종업원들이 주인이란 사실은 재미있다. 공산당 시대부터 러시아인에게는 ‘연줄(러시아말로 Blat)’이 살아가는데 필수요건이란 걸 러시아 문제 전문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러시아의 지배계급은 공산당 시절이나 지금이나 상부상조해 잘 살아 나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부상조는 바로 북한 특권계급의 생활방식이기도 하다. 호텔에 숙박할 때 외국인은 여권을 호텔에 맡기고, 대신 호텔 등록증을 받아 외출한다. 피해망상적으로 그들은 철저한 담보를 요구한다. 이것도 공산당 시절의 유물일 것이다. 호텔 입구에 경비원이 여러 명 지켜서서 출입자를 체크하니 안전하다는 느낌은 있다.

김일훈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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