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서울역 무료진료소

다시서기센터 공보의

끝도 없는 환자들…. 개원의라면 반가운 상황이겠지만 여기는 엄연히 보건지소다.
다시 생각해보니 개원의라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언제 어디서 의료사고가 날지 모르지 두려울 수도 있겠다.
이렇게 많은 환자를 단 1~2분 내 봐야하는 상황에서 환자를 제대로 볼 리 만무하다.

오늘 예진한 환자만 200명, 300명….
하루에 1000명 가까이 예진을 했다는 공보의도 있으니, 그래도 그 보단 낫다는 처량한 생각마저 든다.
근처에 병원이 없는 것도 아닌데 환자들은 이맘때면 접종을 위해 보건지소로 몰려온다. 이들을 탓할 순 없다. 가격이 싼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다만 의료사고가 걱정될 뿐이다.

무의촌 의료를 위해 농특법이 생겨난 지도 벌써 30년.
농특법과 함께 공보의들은 무의촌을 위해 존재해왔다.
그러나 읍ㆍ면ㆍ리 까지 의사들이 들어와 개원하며 환자를 놓고 보건지소와 경쟁하는 지금 공보의의 의미는 이미 예전과 많이 달라져있는 것 같다.
시골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서울 유명 대학병원에 하루 안에 진료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의사가 없어 진료를 받지 못하는 시대는 이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다.
몇몇 도서 벽지는 아직도 병원가기 어려운 지역이라 해도 대부분의 지역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 공보의들은 여기 앉아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예진을 해가며 말도 안 되는 진료를 하고 있는 걸까?

문득 당뇨병 때문에 찾아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난다.
자식이 있어 정부지원도 못 받고 냉방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할머니다.
공보의가 존재하는 의미는 바로 이분들을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수급도 받지 못한 채 철저히 소외되어 사회와 정부의 성긴 안전망 사이로 빠져버린 사람들. 이들을 보살피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공보의 역할이 아닐까.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지만, 최소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몇 십억 짜리 보건소를 세우며 뿌듯해하는 공무원들을 보며 가슴이 막혀오는 것은 그 돈이면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던 환자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일 것이다.
오늘도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우리들은 진료실에서 수백 명씩 예진을 하기보다 진정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의료 소외계층을 위해 일하고 싶다!”
실적 올리기에 급급해 거금을 들여 불필요한 시설을 세우고 일반 환자 보기에 열을 올리는 공무원들을 보면 이젠 쓴웃음만 나온다.
어떤 보건지소는 공무원이 남아도는 주사제 폐기하게 생겼으니 ‘떨이 처방’이라도 해달라고 했단다.

민원 들어오니 대리처방 거절하지 말라는 요구는 이젠 강요처럼 들린다.
듣기로 어떤 공보의는 보지도 않은 환자이건만 이미 백신 접종했으니 사인이나 해달라며 예진표를 들이밀었다 한다.
진정, 공보의는 그들을 위한 행정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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