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중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대변인

지난달 추석연휴를 맞이해 베트남으로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출국하는 당일, 우리를 배웅하는 듯 하늘에서는 시원한 빗줄기가 내렸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저녁 늦게 도착해 숙소로 이동, 짐을 풀고 베트남에서의 첫 날 밤을 보냈다. 의료봉사를 간곳은 수도 하노이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량의 근교 농촌지역. 달리는 버스 안에서의 베트남 풍경은 TV 화면에서나 봐왔던 우리나라의 70년대 농촌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소 떼가 뛰어다니고, 소가 쟁기질을 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논에는 기본적으로 2모작, 농군의 노력에 따라 3모작까지 가능한 기후에 따라 다음 벼의 수확을 위해 이삭만 추수한 벼의 줄기가 우리나라 농촌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사회주의 국가라 그런지 마을마다 학교와 보건기관이 있었다.
보건기관이라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인력과 기구가 갖춰진 병원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시골의 면마다 있는 보건지소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맞을 듯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건물 규모가 우리나라 보건지소보다는 크다는 것 그리고 의사인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보건지소는 대부분 2층 이상의 건물에 진료실 혹은 가벼운 처치를 하는 처치실이 10개 남짓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 등의 보건의료 인력이 교육을 이수한 후 보건지소에 상주하고 의사는 일정기간 동안 여러 마을을 순회하면서 진료하는 행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보건지소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산모관리였으며 산모와 태아의 위생과 영양, 전체적인 건강문제를 관리하고 나중에는 출산까지도 담당했다.

외국의 젊은 의사를 베트남 국민들은 처음에는 신기하게 여기는 듯 싶었다.
처음 한 두 시간 정도는 표정에 변화가 없고 별다른 반응을 안보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보건기관 담당자뿐만 아니라 환자들까지도 여유를 찾으며 반가운 반응을 보였다.

셋째 날 봉사하러 간곳은 소수민족이 사는 산골마을이었는데 베트남이 다민족국가이니 만큼 소수민족은 내전 혹은 난동의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베트남 정부에서 외부와의 접근을 차단해 왔다고 한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 때에는 소수민족을 이용해서 미군이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환자는 위염을 포함한 상ㆍ복부 통증을 호소했다.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장염 등 설사 증상을 가진 환자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약을 준비해 갔으나 의외로 적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환경이 적합했던 모양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다보니 요통을 비롯한 근ㆍ골격계 환자도 적지 않았다.

일주일간 베트남 의료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진료 중에 만났던 모든 환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빠른 성장과 발전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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