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호

강원도 홍천군
남면보건지소 공보의

보통 10월부터는 본격적인 계절독감 예방접종이 시작된다.
65세 이상의 성인, 의료수급자를 대상으로 실시하는데 일반 의료기관에서 유료 접종인 것에 비해 보건소를 비롯한 보건지소 등에서는 접종이 무료로 실시된다. 따라서 거의 모든 대상자들의 발걸음은 공중보건의사들이 배치된 보건소 및 지소로 향하게 된다.
접종이 시작되기 전 해당업무 관계자들(접수요원, 접종요원 그리고 예진을 담당할 공중보건의사)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전산으로 접종 대상자인지 확인하는 일, 말귀 어두우신 어르신들 상대로 예방접종 예진표를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명의 직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몰리다 보니 보건소, 보건지소는 전쟁터와 다를 바가 없다. 아침 출근 길 보통 문을 열기도 전에 잔뜩 줄을 선채 기다리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때때로 난로나 따뜻한 음료를 준비해두기는 하지만 기온이 쌀쌀한 이른 아침에 갑자기 이뤄지는 신체활동이 만성질환을 많이 갖고 있는 어르신들에게 좋은 환경 일리 없다. 접종하려고 오다가 오히려 병을 얻어가기가 십상이다.
본인 상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무리하게 접종하려고 추운날씨에 일찍 나왔다 들어가는 일이 만성질환을 보유한 노인분들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진을 시작하다 보면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다. 과연 내가 올바른 의료행위를 실시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작은 지소라도 하루에 100여명 이상, 제법 큰 보건소는 하루에 1000여명 이상 예진을 실시한다.

대개 1~2명의 공중보건의사가 예진을 담당하는데 단순한 계산으로도 한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예진을 할 때 1분 이상 투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접수나 접종을 담당하는 사람은 추가로 지원이 되지만 예진을 담당하는 의사는 지원되지 않는다. 모든 예진은 고스란히 공중보건의들의 몫인 셈이다.
더불어 짧은 시간 내 예진표를 확인하고 부작용을 설명해야 한다.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면서, 과연 이분들이 내 말을 이해는 할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더욱 큰 문제점은 접종 후 나타날 수 있는 이상반응에 대한 준비가 너무 미흡하다는 것이다.
쇼크, 호흡곤란 등에 대비한 수액, 인공호흡장치, 심전도기 등 많은 장비가 없거나 미약하게 갖추어진 지소나 보건소가 많아 응급상황 시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다.

한편,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공중보건의사들에 대한 적절한 처우와 그들이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력은 정부기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지난해 많은 공중보건의사들이 신종플루 예방접종에 투입됐지만 적절한 교육은 물론 약속했던 적절한 대우도 받지 못했다. 국민건강의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공중보건의사들의 사기가 꺾이는 일이 올해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