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냑’ 명칭 프랑스 브랜지 산지서 차용
꼬냑지방 기후•토양, 브랜디 최고 명산지로

▲ 9-1

한 꼬냑 회사에 걸려 있는 꼬냑 지역의 지도. 이 사진에서 하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전체 꼬냑 지역이다.

브랜디(Brandy)란 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포도로 만든 증류주를 말한다. 세상의 모든 술은 기본적으로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곡물로 만든 발효주가 맥주이고 이를 증류한 것이 위스키라면, 포도로 만든 발효주는 와인이며 이를 증류한 것이 바로 브랜디인 것이다.

물론 브랜디란 명칭은 포도로 만든 증류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로 만든 증류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칼바도스(Calvados)로 대표되는 애플브랜디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포도로 만든 브랜디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냥 브랜디라고 할 때는 보통 포도 브랜디를 자동적으로 의미한다.

브랜디는 이론적으로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브랜디의 명산지로는 프랑스의 꼬냑(Cognac) 지방이 단연 손꼽히고 있고, 나머지 지역의 브랜디들은 꼬냑의 그늘에 가려 국제적으로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브랜디의 대명사로서 또는 흔히 브랜디와 동의어로까지 혼용되고 있는 ‘꼬냑’이란 명칭은 실은 유명한 프랑스의 브랜디 산지를 일컫는 말로 그 지방에서 나는 브랜디만을 꼬냑으로 지칭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꼬냑은 브랜디이지만 모든 브랜디가 다 꼬냑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꼬냑 지방은 와인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보르도 지방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사진 9-1). 꼬냑 지방에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3세기경 로마군이 진주하면서부터였다. 이 지역이 특히 역사적으로 지형학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인근에 로쉘(La Rochelle)이라는 최적의 항구를 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해안무역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중세 말에 이 지역은 당시 금만큼 귀하게 여겨졌던 소금의 명산지로서 로쉘 항구를 통해 북유럽 국가들에 활발하게 수출을 하였고 이와 함께 와인도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등지로 수출하면서 번영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번영을 누리던 꼬냑 지방도 13세기 들어 당시 르와르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와 보르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잉글랜드 간의 주도권 싸움에 끼어들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꼬냑 지방은 결국 프랑스의 편을 들게 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지역을 점령한 잉글랜드 군에 의해 지역 포도밭들이 모두 파괴되고 마는 재앙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6세기에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지역은 프랑스의 신교도인 위그노(Heugenots)파와 동맹을 맺게 되고, 이는 비록 구교도인 다른 프랑스 지역들로부터는 소외되었지만 대부분이 신교도 국가였던 북유럽 국가들과 다시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소금 무역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포도 재배가 늘어나면서 와인 무역도 증가하게 되었다.

이즈음 때맞추어 증류기술이 꼬냑 지방에 소개되었다. 꼬냑 지방에서 브랜디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1638년인데 근처의 경쟁지역인 알마냑 지방이 그 당시 벌써 200년간의 증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데 비하면 오늘날 최고의 브랜디 명산지인 꼬냑은 역사적으로는 상당한 후발주자였던 것이다. 물론 꼬냑 지방에서 그 이전에도 소규모 증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적어도 상업적 수준의 증류는 17세기 중엽에 와서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브랜디 생산에 있어 후발주자였던 꼬냑 지방이 급속히 브랜디의 최고 명산지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16세기부터 당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네덜란드는 꼬냑 지방의 소금과 와인 무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 9-2

화려한 병 모양을 자랑하는 꼬냑 고급품들. 사진의 제품들은 모두 50ml 미니이처들이다.

해상무역으로 북유럽뿐만 아니라 멀리 카리브해, 수마트라까지 진출하였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긴 항해 동안 식수나 와인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용도로 강한 알코올 농도의 술이 필요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꼬냑 지방의 와인을 사서 자국에서 브랜디로 증류하였으나 곧 현지에서 바로 증류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지금의 브랜디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도 이때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 증류주를 자기나라 말로 ‘Brandewijn(타는 와인)’이라고 부른데서 연유하고 있다. 이후 꼬냑은 북유럽 특히 영국 상류층에서 가장 선호하는 술이 되었고, 간혹 정치적 이유로 수입 통제가 되었을 때에는 가장 중요한 밀수 품목의 하나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꼬냑이 브랜디의 최고 명산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러한 지형, 사회적인 이유 이외에 무엇보다도 꼬냑의 원료가 되는 최적의 포도를 생산할 수 있는 꼬냑 지방 특유의 기후와 토양 조건에 있었다. 그리고 1669년 당시 프랑스 황제였던 루이 14세의 칙령에 의해 인근 리무쟁(Limousine)과 트론케(Troncais) 지역에 대규모 오크 삼림이 조성된 것도 훗날 꼬냑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즉 당시 재무장관이였던 콜베르(Colbert)의 주도하에 선박 제조용 목재를 공급할 목적으로 조성된 이 거대한 나무숲이 훗날 꼬냑 숙성용 저장통의 공급원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서 향후 꼬냑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

꼬냑의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브랜디업계는 점점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 이를 증류하는 증류업자, 그리고 이들 증류액(distillate, eaux-de-vie)을 사들여서 블렌딩을 숙성하여 수출하는 상인들의 세 가지 분야로 업무가 세분화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상인들의 역할이 더욱 커지게 되었고 이때 오늘날 볼 수 있는 대규모 꼬냑 회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탄탄대로의 성장을 해나가던 꼬냑 앞에 새로운 재앙이 가로 막고 섰다. 즉 1871년 ‘필록세라’라는 포도나무 병충해가 전 유럽에 창궐하면서 단시간에 꼬냑 지방의 포도밭도 황폐화시켰다. 이후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가진 미국산 포도나무와 접을 붙이는 과학적 노력으로 필록세라의 피해를 줄여 나갔지만 여기에 들어간 많은 재원과 그에 따른 시간 소요를 대부분의 농부들은 견디지 못하였다. 즉 포도나무는 일반 곡물과는 달리 새롭게 심자마자 바로 이듬해에 작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꼬냑 지방의 포도나무들을 필록세라에 저항성이 있는 새 종자로 완전히 교체하는 데에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우여 곡절 끝에 꼬냑 업계가 다시 정상을 찾았을 때는 그동안 대체 효과를 톡톡히 누렸던 스카치 위스키와 진(Gin)과의 강력한 경쟁을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꼬냑은 이러한 시련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대규모 경제 불황 속에서도 착실히 최고의 술로서의 명성을 이어 나갔다(사진 9-2). 오늘날 꼬냑 생산량의 95%가 해외시장에 수출되는데서 알 수 있듯이 꼬냑은 전통적으로 항상 새로운 해외 시장 개척에 힘썼다.

1970년대에 유럽과 미국 시장에 불황이 오자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 시장이 새로운 시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시아 시장마저 경제 슬럼프로 하강 곡선을 그리자 꼬냑 업계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즉 성공한 중년 남자를 위한 고급술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신세대와 여성 취향의 광고 활동을 강화하는가하면 심지어 최근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보드카와의 경쟁을 위해 고급술의 이미지를 벗고자 칵테일용 꼬냑을 의도적으로 내놓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향후 새 21세기에는 꼬냑이라는 명품 술의 운명의 추는 또 어느 쪽으로 움직이게 될지, 꼬냑을 사랑하는 애주가들에게는 흥미 있는 관찰 대상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