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日과 지폐 인물

- 지폐인물을 통한 한‧중‧일 3국 비교 -

표절당하고 있는 필자의 글

필자는 ‘한‧중‧일과 지폐인물’이라는 평론을 지난 2000년 7월 19일자 이슈투데이(www.issuetoday.com)의 칼럼에 게재해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끈바 있다. 다른 언론기관에서 남의 글을 인용하려면 작자와 출처를 명시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에 정체불명의 노지연(http://blog.daum.net/dkl7376/9178485)이라는 자는 필자의 ‘한‧중‧일과 지폐인물’ 글 앞뒤에 제목과 관련된 글을 몇 줄 넣고서 필자의 글은 작자불명하게 지능적 표절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http://kr.blog.yahoo.com/gyjr12001395/10www.lovelet.com서도 같은 짓을 하고 있음을 독자에게 알린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상습적인 표절행위가 법에 저촉되지 않고 방치되는지 궁금하다. 이번에 ‘한‧중‧일과 지폐인물’ 글을 디지틀보사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해 본다.

▲ 김일훈 박사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장 좋아한다. 사람들이 돈을 너무 탐내다보면 위조지폐가 지능적으로 발달됨으로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서는 지폐의 인물 도안을 한 번씩 바꾼다.

한국에서는 돈을 찍어내는 ‘조폐공사’ 사장 자리는 정부의 고관직이라고 들었다. 4.19 직후 반독재투쟁에 공헌한바 있는 이름난 한 분이 많은 감투를 마다하고 “이제 좀 쉬겠다”고 조폐공사 사장을 자원해서 맡은 일이 기억난다. 돈을 호주머니에 마음대로 집어넣는 자리가 아닐텐데, 아마도 그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공급한다는 자기만족에서 그 자리를 원했을 줄 안다.

필자도 돈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돈(지폐)속에 그려진 인물에도 관심이 많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지폐 가운데 나타난 인물을 관찰해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중국‧일본의 지폐인물을 통해 3국의 역사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국화(國花)가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라면 지폐인물(이하 ‘돈 인물’이라 함)은 그 나라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라 하겠다.

한‧중‧일 3국의 돈 인물을 분석해볼 때 제가끔 자기나라의 오늘을 있게 한데 가장 중요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국은 ‘(사망한) 현대인물’, 일본은 ‘근대인물’ 인데 비해 한국은 ‘옛 인물’ 을 선택한 것이 특징이며, 이 시대적 차이가 큰 뜻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잠자던 대국이 이제 막 깨어나서 현대화와 생활향상을 지상목표로 하는 중국은 그들이 많이 사용하는 ‘백원’지폐 가운데, 통일된 오늘을 있게 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가장 큰 공로자 4명을 실었으니 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 등이다. 모두 현대 지도자들이다. 다른 액수의 지폐에는 중국 소수민족 사진을 나타냈으며, 한족(漢族) 위주의 중국에서 소수민족을 크게 배려한다는 뜻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위의 백원 지폐의 인물만 살펴본다.

중국은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명의 요람지며, 아시아의 유일한 대국이나, 대 문화혁명 때 자기네 과거 역사문화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던 시기도 있었고 또 새삼 중화사상을 선전하는 일은 그네들 사회주의이념에도 배치된다. 따라서 중국의 돈 인물은 보다 전향적인 현대인물을 택한 듯하다.

일본은 옛적에는 동양에서 야만국 취급받던 섬나라였으나, 아시다시피 명치혁명(유신)이래 급속도로 서구화하야 선진국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즉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서 세계열강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근대사에서 선진국 이루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은 정치가, 군인, 경제인 등이 주가 되겠지만, 이들은 직접‧간접으로 일본군국주의와 제국주의과정에 책임져야할 자들이 대다수다.

그리고 경제대국 일본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문화대국임을 자랑함으로서 고상한 차원 높은 인상을 세계에 심으려든다. 실제로 일본은 그 인구가 세계인구의 2% 남짓하면서도 일본어 출판물이 영어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차지하는 문화대국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으로 해서 일본지폐는 정객을 기피하고 오늘의 선진문화의 터를 닦은 문화계인물을 뽑았다고 본다. 즉 1천엔권의 나쯔메 소-세끼(夏目漱石, 작가), 5천엔권의 니-도베 이나조(新渡戶稻造, 교육가‧계몽가)와 1만엔권의 후꾸자와 유기찌(福澤諭吉, 사상가‧교육가‧문필가)가 대표적 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한가? 솔직히 말해서 지난 20세기의 한국역사는 치욕밖에 없었다. 20세기 전반에 식민지란 굴욕기간을 거쳤고, 후반에는 동족상잔의 전쟁과 냉전의 전초지가 되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한국이 자랑할 일은 선비의 나라와 문화민족의 전통을 심은 우리 옛 조상밖에 없다. 옛날 우리는 약소민족인데도 지식인이 지배하는 동방예의지국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지폐는 옛날 우리를 문화민족으로 세상에 돋보이게 한 세종대왕과 학자들을 뽑았다. 1만원권의 세종, 1천원권의 이퇴계(李滉 유학자‧교육가), 5천원권의 이율곡(李珥 유학자‧경륜가) 등이다.

다음은 돈인물의 내면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중국: 중국 돈에 실린 4인방(모택동, 유소기, 주은래, 주덕)은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특등공신들이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지역감정을 중심으로 인간관계의 조직적인 인방(人幇)이 발달되었다. 가령 ‘3국지의 3인방’하면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의리와 신뢰로 맺어진 집단이며, 한때 악명 높았던 강청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은 극좌파의 정권장악 목적을 위해 이해관계로 뭉쳐진 집단이었다.

그런데 중국 돈의 4인방은 반드시 동질성의 인물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중국역사가들이 공정성을 위주로 해서 뽑은 국가건설 최대의 공로자들이다.

모택동은 세계가 인정하는 중국통일의 영웅이다. 그의 시인(詩人)적인 지성과 뛰어난 영도력을 갖춘 카리스마로 해서, 중국에서 절대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그가 저지른 크나큰 과오와 상쇄되기 마련이다.

모택동은 자기의 에고(Ego)를 충족시키기 위해 잘못 인도한 문화혁명은 무고한 몇 백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고, 중국경제와 문화를 몇 십 년 후퇴시킨 죄과는 진시황의 갱유분서(坑儒焚書)와 맞먹는다.

진시황 이래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완성한 그의 업적 뒤에는 독재자로서의 용서 못할 많은 과오와 실책이 있었다. 그러나 1981년 중국공산당은 정식으로 그의 생애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해서 모택동을 ‘위대한 혁명가’라 부르고 ‘그 위대함이 그의 과오를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역사적 평가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인의 도량 있는 마음가짐에 놀라는 한편, 사관(史官)의 전통있는 공평무사한 판단을 엿볼 수가 있다.

여담이지만, 한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독립투사요, 대한민국 건국의 어버이시며, 6.25동란에서 조국을 구해낸 인물인데도 만년의 그의 독재와 실정으로 해서 아직도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사실인즉 이 박사의 실정은 모택동 것에 비하면 약과나, 아량이 적고 감성에 치우치는 한국인 기질 탓으로 푸대접 받고 있다. 멀지 않는 장래에 4.19세대의 분노가 진정되어 이 박사의 건국업적이 제자리 찾을 날을 기대해 본다. 그날이 오면 서울의 새 공항 이름도 ‘우남 비행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국 돈에서 모택동 다음 인물은 유소기(劉少奇) 국가주석이다. 그는 문혁 이전에 중공의 제2인자로서, 탁월한 행정가요 경제정책수립가로 알려진 실력가였다. 중국정부의 골격을 구축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렇듯 유소기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모 주석과 강청의 질투를 사게 되어, 문화혁명시 역적으로 매도되며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소기는 그 후 복권되었으며, 현 중국에서 모택동에 버금가는 건국 유공자로 추대 받고 있는 터이다. 여기서 다시금 중국역사기록의 공평성을 읽게 된다. 역사바로잡기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관(史官)의 전통을 재확인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예를 들어서, 만일 김일성 사후 그에 의해서 죽음 당한 박헌영을 북조선정부수립의 두 번째 유공자라해서 복권시켜 추앙한다면 해가 서쪽에서 뜰 것이다. 그러나 사관의 정기는 조선에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때 이야기로, 고려 말에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길재 두 사람은 조선조에서는 역신인데 이들을 책에서 충신에 넣느냐 아니 넣느냐는 문제로 사관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이때 세종대왕의 다음 말씀은 신하들을 감격의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정몽주와 길재는 당연히 충신에 넣어야 하지요. 역사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승자가 역사를 이끌어 나가지요. 그런데 승자가 패자를 모두 역적으로 둔다면 역사는 끊어지고 맙니다.… …고려의 신하가 망해가는 고려에 충절을 바쳤다면 그는 만고의 충신이 됩니다.” 한국지폐 1만원권을 장식하는 세종대왕은 과연 위대하신 성왕이었다.

다음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특히 서구사회에 인기 있는 주은래는 중공의 세 번째 유공자다. 우선 그의 수려하고 온화한 용모와 인상이 호감을 준다. 그는 시종일관 모 주석을 받들고 도와 중국건국의 기반을 닦는데 이바지해왔다. 그러나 파란 많은 공산당이라는 암투사회에서 끝까지 잘 헤엄친 주은래고 보면, 일부에서는 위선자며 요령 좋은 회색분자라고 평가절하 되는 일도 있다. 팔방미인이 으레 듣는 악평이기도하다. 하지만 그의 온화하고 참을성 있고 타협적인 성품으로 해서 모 주석의 신임을 잃지 않았으며, 강청 4인방의 독주를 지혜롭게 견제한 공적은 역사에 크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혁명 때 그가 유소기를 비난하는 모 주석의 뜻을 발표하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중국문화재를 홍위병의 파괴로부터 잘 보호하고 많은 지성인을 구제한 사실도 높이 기억되고 있다. 강청파로부터 자신이 ‘현대의 공자’란 모함을 받으면서도 주은래는 끝까지 공자의 ‘중용’의 미덕을 지켰던 것이다.

네 번째 중국 돈 인물은 주덕(朱德)이다. 그는 중공군 사령관으로서 국공전(國共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일전쟁 때는 항일전(抗日戰)을 지휘했으며, 일본은 중공군을 주모군(朱毛軍)이라 했을 정도로 주덕을 모택동보다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사진에 나타난 그의 인상은 천진하고 소탈한 중국농민의 모습이다. 영도자로서의 행적도 그의 인상과 비슷하다. 그의 이름(朱德)과 같이 그는 붉지만 덕이 있는 위인이다. 최고군사령관이라면 모택동 자리를 노려 쿠데타 한번쯤 시도했을 법도한데, 그는 끝까지 모 주석에 대한 충성일변도였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고한다. 그러나 항상 주류파로서, 당의 원로로서 강청 등의 급진파를 견제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기도하다. 그는 문혁 때 모주석의 신임이 두터웠던 화국봉(華國峯)이란 젊은 로봇을 적극 후원함으로서, 4인방의 세력 확대를 막는데 숨은 힘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덕이 있는 주덕을 모 주석은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식 지도자와 덕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으로 이상적인 정치는 덕치를 말함이다. 중국은 중일전쟁에서 수백만 명의 인명을 희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대한 손해배상마저 양보한 대국인이다. 이상과 같이 중국 돈의 4인물을 소개했다.

▲일본: 문화적인 면에서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겠지만, 앞서 말한 3인을 선택했으니 이들을 살펴본다.

나쯔메(1867-1916년)는 동경대학 영문과출신이며 한때 영문과교수직도 가졌다. 그는 근대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자 국문학자며,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부를 만큼 그의 작품은 값진 고전으로 남아있다. 그는 말과 글이 동일한 구어문(口語文)인 현대일본어를 확립한 대표적 인물이기도하다. 옛 일본은 내세울 문화적 건더기가 별로 없지만, 문학분야만은 예외로 우수한 문예작품이 많다.

나쯔메는 이러한 전통을 되살려 서구적인 문학과 동화시켜 찬란한 현대문학을 탄생하게 한 작가 중의 하나다. 이미 노벨문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바있는 일본문학은 그네들의 첨단과학에 못지않게 빛을 내고 있는 터이다.

여기서 특기할 일은 한국 근대작가 중에는 학벌이 보잘것없는 천재들이 많은데 비해, 일본은 일류대학출신의 천재작가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외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들이 많음으로써 일본현대문학의 세계화를 촉진케 했을 줄 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와바다(川端)는 동대(東大) 영문과, 오-에(大江)는 동대 불문과, 그리고 아꾸다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꾸다가와(芥川)는 동대 영문과출신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일본 근대와 현대문학에서 나쯔메의 여러 작품은 10대 명작에 들어간다는 평이다.

나쯔메의 유명한 짧은 글 하나를 여기에 소개한다. “지(知)를 앞세우면 모서리(角)난다. 정(情)이라는 배를 타면 흘러가 버린다. 의지(意志)를 고집하면 너무나 답답하다. 아무튼 이 세상은 살기 힘들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문학과 예술이 있다.”

후꾸자와(1835-1901년)는 태평양전쟁 종결과 더불어 그의 이름도 시대의 각광을 받아 클로즈업되었다. 일본개화기와 명치시대의 사상가요 문필가다. 게이오-대학 창시자로 우리나라 학국 말기에 김옥균 등 개혁인물을 적극 도왔고 유길준 등 많은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그의 탈아론(脫亞論) 때문에 한국에서는 달갑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 명치유신 초기부터 서구의 새 문명과 새 사상을 문필과 교육을 통해 일본인을 개화시킨 선구자다. 1870년 서양을 소개한 ‘서양사정’이라는 책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유길준이 1889년에 낸 ‘서유견문’이란 책은 바로 후꾸자와의 책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당대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관직의 유혹을 뿌리치며 야인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본근대화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그의 명언이다.

니-도베(1862-1933년)는 일본에서는 드문 크리스천이고, 교육을 미국과 독일에서 받았으며 미국여자와 결혼한 국제적 인물이다. 교수생활도 역임한 바 있는 그는 저술활동과 국민계몽을 통하여 일본의 국제화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전문직보다 상식(common sense)을 강조했으며 일본문화를 책으로 엮어 미국에 많이 소개했다. 그의 소원은 “태평양을 통해 동과 서의 교량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현재 자유와 번영을 최대한 누리고 있는 일본에서는 니-도베가 역설한 국제인과 상식이 가장 요구되는 시대라 해서, 니-도베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일본돈 인물은 암흑시대에서 급속도로 벗어나게 한 근세의 문화적 선구자 3인을 뽑았다.

▲한국: 한국은 근대와 현대사에서 치욕으로 가득 차기도 했지만, 옛날에는 자랑스러운 조상을 가진 으뜸가는 문화민족이었음을 지금 세상이 인정하고 있는 터다. 2000년 초에 발간된 ‘The Life Millenium’지에서는 지난 1천년간 세상에서 가장 큰 업적 100개를 전문가에 의해서 뽑았는데 그 첫째가 금속활자 인쇄기보급이며, 그 발명자는 ‘Korean’이라 적혀있다. 앞서 언급한 세종대왕을 비롯한 위대한 옛 선비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의 돈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인물들이라 간단한 소개로 끝맺는다. 세종대왕은 한글창제 및 국악과 과학발전 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동방의 성왕이시다. 이퇴계(1501-70년)와 이율곡은 동양의 거유(巨儒)로 잘 알려져 있다. 성리학 주자학을 체계화한 동양의 대표적 철학가다. 이퇴계의 학문 ‘퇴계학’은 일본학계에 더 잘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지폐인물에서 “왜 중국은 현대인, 일본은 근대인 그리고 한국은 옛 인물을 선택했나” 하는 점을 고찰해봤다. 그리고 왜 3국은 제가끔 다른 분야의 인물, 즉 중국은 정치인, 일본은 문화인, 한국은 주로 선비 학자를 선택해야만 했나를 생각해보았다.

한‧중‧일은 몇 천 년 자라난 동양이라는 거목의 기둥이다. 중국과 일본은 돈 인물을 통해서 그들은 제가끔 서양문명에 뒤쳐진 자기나라를 회복하려는 역사적 의욕이 역력히 보인다. 그러나 역사가 토인비는 현재의 서구문명도 지구상에 나타났다가 소멸하는 많은 문명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제 21세기 태평양시대를 눈앞에 바라보며 우리 한국인은 돈 인물에 나타난 우리 선조들을 더욱 자랑하게 될 것이다.

추기: 서두에 언급했듯이 한국과 미국에서는 지폐도안을 한번 씩 바꾸는데, 중국에서도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 근래 중국 백원 지폐에서 2명의 인물서열이 바뀌어 유소기(2위)가 3위로 되고 주은래는 3위에서 2위로 격상됐음을 알린다(다음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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