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진주만의 미주리와 애리조나 관광

미주리 함상에 전시된 사진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한 당시의 일본외상 ‘시게미쯔’의 모습이 보이는데 한쪽 다리를 잃어 지팡이를 짚고 서있다. 그가 실족한 다리는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한 사고 때문이었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 김일훈 박사
在美 내과 전문의, 의사평론가
전함 미주리와 애리조나

일본패전 후 1945년 9월 2일 동경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일본군과 연합군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거행된 전함 ‘미주리 호’가 역사박물관으로 하와이 진주만에 계류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된 관광코스의 하나로 되어있다.

종전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미주리州 출신이라고 해서, 미주리호가 태평양전쟁을 마무리 짓는 장소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2차 대전 중에 건립된 전함 미주리는 오키나와 상륙전에 활약하고, 2차 대전 이후 한국동란과 항만전쟁에도 참여한바 있다. 그 후 해군선적에서 퇴역한 미주리는 1998년 6월 하와이진주만에 도착하여, 1999년 1월 29일부터 미주리-기념관이 오픈되었다.

현재 전시된 미주리호 바로 옆에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가 있어, 뱃머리(얼굴)를 서로 맞대고 있어 재미있다. 태평양전쟁의 최초와 최후의 ‘증인’이 서로 얼굴을 맞대며 평화롭게 공존해 있기 때문이다.

미주리 항복조인식의 일본대표는 종전직후의 일본외상 ‘시게미쯔 마모루’(重光 葵)이다. 그리고 전함 애리조나 침몰 등 진주만 비극을 초래케 한 일본의 대미선전포고에서 본의 아니게 주역으로 말려든 당시의 대일본제국 외무대신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이다.

이들 둘은 각각 태평양전쟁 개시와 종말의 주역이고, 더구나 우리 한국과 인연 깊은 사람이라는 사실로 해서, 지난번 나의 진주만 관광 때 느낀바있어 이글을 쓰는 바이다.

진주만관광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두 전함을 보면서 서로 관련된 두 인물을 생각하며, 여기에 한국적인 연관성을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지팡이에 의지하는 시게미쯔

항복식이 이루어진 미주리함의 한구석 좁은 공간에는 조인된 항복문서의 사본과 당시의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있어 우리처럼 관심가진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일본대표 시게미쯔 외상은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서류에 사인했으며, 사진에서 보듯 그는 지팡이를 짚고 서있다.

일본의 중국침략자들이 1932년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거행한 일본천황 생일 축하식을, 우리의 윤봉길 의사가 폭탄으로 뒤엎어, 장개석으로 하여금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윤 열사가 능히 했으니 장하도다”라는 감탄사를 내게 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바로 그때 당시 일본의 상해 총영사였던 시게미쯔는 부상으로 다리하나를 실족했던 것이다.

나는 안내자에게 “일본대표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왜 그가 불구자가 된 줄 아느냐?”고 질문해봤더니, 물론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미국의 언론인이나 역사가도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오래전에 인용한 적이 있지만, 미국의 유명한 작가 테오돌-화이트는 2차 대전시에 중국에 종군했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In Search of History’란 책을 섰다. 이 책의 제6장을 보면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조인식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이때 일본대표 시게미쯔 외상은 의족을 끌고 함상에 나타났는데 그를 가리켜 “He had lost his leg in an assassination attempt before the war: the radicals of prewar Japan had tried to kill him because he wanted peaced”라고 적혀있다.

한국독립운동이나 윤 열사에 관해선 언급조차 없고 시게미쯔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우익 테러단에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고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이 책을 읽은 나는 1979년 장문의 편지를 써서 화이트에게 시정을 바랬지만 감감무소식이다. 일본에서 친미파로 알려진 시게미쯔는 전쟁당시의 감투로 해서 동경 전범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전후 일본정계 지도자로 활약한바 있으며, 한때 한일회담 일본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전쟁 개시·종결 책임자 ‘도고’

1941년 12월 7일 선전포고 이전에 일본 해군전투기의 진주만 기습으로 그곳에 정박 중인 전함 애리조나를 비롯한 미국 태평양함대의 주력전함이 궤멸되다시피 했다.

애리조나 기념관은 침몰된 애리조나 선체 위에 설치되어있고, 그 한가운데 미국 국기가 게양되어있다. 선체 위를 가로질러 대리석을 세워, 전사자 이름이 새겨있다.

대미선전포고 및 진주만 기습과 연관된 개전내각, 그리고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종전내각의 외교책임자는 공교롭게도 전쟁 반대자이자 한국혈통을 물려받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였다.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때 남원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납치된 도자기 기술자이고 그들은 구주남쪽 가고시마에서 25km떨어진 해변고을 미야마(米山)에 정착하여 대대로 도자기공을 영위해왔다. 1882년에 태어난 도고의 출생시 이름은 박무덕(朴茂德)이었으나, 5세 때 도고 시게노리로 개명되었다.

도고는 동경제대 독문과를 수석졸업하고, 외교관이 되어 시계미쯔와 더불어 전쟁이전 일본외교의 주도인물이 되었다. 그는 원래 전쟁 반대론자였으나 군부압박에 의해 본의 아니게 대미 선전포고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말기엔 군부의 반대와 생명위협을 무릅쓰고 포츠담선언수락(조건부항복)을 추진한 핵심인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동경 전범재판에서는 선전포고 이전에 일본 해군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사건을 일본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범죄로 다루었다.

이에 대해 기습계획의 책임자인 시마다 해군대장은 재판에서 “외무부의 사무착오로 선전 포고문 전달이 지연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습이 되었다”고 우겼다.

그러나 도고는 “일본해군의 계획적인 기습”이라고 사실대로 진술하여 재판부에 적극협조 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 우익계에서는 “도고는 조선인의 피를 물러 받아 거짓말도 잘 한다”고 비꼬는 못된 자도 있었다. ‘조선인’임으로 해서 입은 상처는 그의 청춘시절에 소급한다.

대학생 때 병을 얻어 1년 휴학계를 내고서 동경서 멀지 않은 닛꼬(日光)에서 요양생활을 한바 있다. 외롭던 그곳에서 졸업반 여고생 S를 알게 되어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100년 전 대학생들은 대개가 기생방 출입으로 섹스 충족하는 일이 고작이고, 연애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젊은 도고와 S는 그늘진 곳에서 키스하는 즐거움도 누렸다. “소설에서 외국인들은 왜 그런 짓(키스)을 하는지 의문이었으나, 이제 알만합니다”라는 것이 S의 고백이기도 했다. 도고의 손이 그녀의 가슴에 가는 실수도 있었으나 그럴 때면 S말이 “졸업하면 아버지를 설득시켜 동경에 공부하러 가겠으니, 그때까지 참아주세요”라 했다.

동경대학에 복학한 도고는 S와 교신하며 그녀와 약혼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곧 동경에 도착할 것이라는 편지가 있은 뒤,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다.

이상하다고 여기던 중 하루는 고향(가고시마) 아버지로부터 “최근 흥신소 직원이 고향에 나타나서 너의 신원조회를 해갔는데, 취직인지 혼담인지 네게 짐작 가는 점이 있는가”하는 편지가 날라 왔다. 청천벽력이었다.

S의 아버지는 딸의 상경에 앞서, 도고가 한국계가 많은 구주의 미야마 출신이라는 점이 의심스러워 흥신소 조사를 의뢰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인 피를 타고났다 해서 사랑을 거역당한 비극을 그는 젊었을 때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이런 상처를 안고서 도고는 1919년 독일의 일본대사관 3등서기관으로 근무할 때 그곳에 비서로 근무하던 독일 여자 그것도 자녀가 5명이나 있는 미망인 ‘에디타’와 눈이 맞아 서로 연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도고 40세) 그녀와 결혼하게 되니 이때 에디타는 36세고 그녀의 장녀 나이 17세였다.

에디타는 자녀 5인을 보육원과 학교숙소에 맡기고서, 외교관 남편(도고)을 따라 다녔다.

그 여자(에디타) 또한 한국과 인연이 있는지라 보충설명 해본다.

에디타는 일본에 파견된 독일 은행가의 딸로서 18세에 일본에 체재중인 독일 건축가 F와 연애결혼하여 동경에 거주하며 자녀 5명을 낳았다. F는 이름난 건축가로 서울의 조선총독부와 조선호텔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F는 심장병으로 41세에 급사했으니 이때 에디타 나이 27세며 장녀는 8세였다. F 사망 후 그녀는 5자녀를 이끌고 독일에 돌아갔으며, 일본과의 인연으로 일본대사관 비서로 취직하게 되고 그곳에서 총각외교관 도고와 눈이 맞았던 것이다. 일본 여자에 실연한 상처를 외국 미망인에게서 보완했다고나 할까.

도고는 전범재판에서 소련측 주장으로 전쟁개시의 책임을 물어 20년 금고형을 받았으며 1950년 67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이상과 같이 진주만의 두 전함 기념관 관광에서 여기에 얽힌 한국과의 인연을 생각해 보았다.

▼진주만의 전함 미주리 앞에서 필자부부.

▼왼편은 전함 미주리. 오른편은 애리조나 선체위의 기념관(흰색).

▼항복조인 일본대표(지팡이 짚은 시게미쯔).     

   

▼개전과 종전의 외상 ‘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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