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규 교수
- 고려의대 신장내과

- 의사평론가

 지난 달 법원은 복지부에게 '삼성SDS에 360억 원을 6년에 걸쳐 나누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내용은 이렇다. 복지부가 2001년에 '의약품유통센터'를 만든다면서 삼성SDS에 시스템구축을 발주했다가 센터사업이 흐지부지되는 바람에 복지부의 말만 믿고 전산시스템을 구축했던 삼성SDS가 복지부에게 배상을 청구하게 된 모양이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사업의 하나인데, '의사·약사의 의약품과 관련된 리베이트를 끊기 위해서는 약품 구입을 정부가 하고, 돈도 정부가 대신 내준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혁명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한 생각을 누군가가 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모든 의사나 약사는 가상의 범죄자이므로 기회만 있으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부가 범죄로부터 의사·약사를 보호하겠다는 고마운(?) 발상을 한 셈이다. 그래서 제약회사는 약을 만들어서 정부에 팔면 정부는 그 약을 의사·약사에게 팔고, 그러면 의사·약사는 돈을 정부에게 주고, 돈을 받은 정부는 그 돈을 제약회사에 준다는 것이다. 이런 사업을 의약품유통센터가 장악을 하고자 시스템 구축을 위하여 정부 돈 360억을 쏟아 부었다가 날렸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업은 언론의 표현대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특정분야의 소비재 유통을 정부가 장악하겠다는 것이 혁명적이다. 무기를 제외하고는 정부가 유통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소비재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약품처럼 생산자도 다수이고, 소비자도 다수인 제품의 유통을 통째로 정부가 장악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같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나라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혁명적인 발상은 의약품의 유통을 장악 할 뻔했던 '의약품유통센터'가 의사들보다 더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환자를 위해 일 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경쟁이 없는 조직이 얼마나 문제가 많을지는 정부 산하의 공기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혁명적인 것은 이러한 무모한 아이디어를 김대중 정부가 받아들여 실행에 옮기려 했다는 점이다. IMF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정신이 없을 시기에 그리고 WTO DDA 협상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가 의약품의 유통을 장악하겠다고 한 시도는 누가 봐도 시대에 역행하고,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당시 복지부장관을 했던 김모임, 차흥봉 두 분의 의견이었는지, 아니면 지금도 청와대 근처에서 서성이며 코드를 맞추고 있는 개혁실세의 아이디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정책으로 결정되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일관되게 이런 종류의 정책을 추진한 그룹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자신도 인정했듯이 대표적으로 실패한 정책인 의약분업도 결국은 이런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 졌다는 느낌이다. 의약분업은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복지부를 순시하면서 의약품과 관련된 납품비리를 근절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라고 언론에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의약품유통센터에 관한 구상도, 그리고 의약분업도 의약품납품비리를 없애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입안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렇다면 의약품 비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의약품유통센터설립이나 의약분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보다 더 크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 왜 김대중 정권은 약소비의 증가로 인하여 의료서비스의 질은 떨어지는데도 오히려 의료비는 올라가는 의약분업과 같은 잘못된 정책을 그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였을까· 그리고 정권이 바뀌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도 이러한 의료의 하향평준화 정책은 왜 끊임없이 시도되는 것일까.

 의료에 관한 잘못된 믿음과 의료현장을 모르는 오만과 독선이 차라리 의료의 문외한보다 더 심각하게 국민 건강을 해치고, 의료 수준을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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