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규 교수
- 고려의대 신장내과

- 의사평론가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어제도 진료 예약을 해놓고 오지 못한 환자가 여럿 있었다. 물론 바빠서 오지 못하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경제적인 이유가 많다. 대학 병원에 한번 다녀가면 아무래도 돈이 수월치 않게 들기 때문이다. 검사도 해야 하고, 진찰료에 차비까지….

 내가 전공하는 신장병은 만성병이다 보니 오래 다니는 환자가 많다. 다니는 동안 자녀들이 진학도 하고, 결혼도 하고, 또 간혹 배우자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어제 진료한 60세 초반의 여자 분도 그런 환자였다. 원래의 약속 날짜가 훨씬 지나서 오셨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눈시울을 적신다. 올 봄에 남편이 암으로 돌아가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 달 전에 큰 아들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 환자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남편의 암 투병으로 많은 재산을 날렸는데 큰 아들까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뒷감당이 벅찰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큰 아들의 갑작스런 사망 사연은 안타깝다. 직장을 다니다가 IMF때 실직을 하고 조그마한 음식점을 내었는데 최근 경기가 나빠지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하였다. 고혈압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그 할머니가 그 전에 어린 손자를 키웠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큰 아들 부부가 식당일에 매달리느라 애기를 돌볼 수 없어 할머니가 대신 애기의 육아를 맡았던 것이다. 그 당시에도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돌보느라 힘들어했지만, 버젓이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던 큰 아들이 실직하고 음식점을 해야 하는 것에 더 힘들어하셨다. 초등학교 다니는 손자들과 큰 며느리와 함께 힘든 세상에 남게 된 그 분의 탄식은 뜻밖에도 '외롭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같이 살아온 남편을 여의고, 믿고 의지하던 큰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 그 할머니를 좌절하게 한 것은 주위의 무관심과 냉대였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의지가 되어주기에는 우리 사회는 너무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병원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 만나는 환자의 연령도 다양하고, 직업도 천차만별이며, 사는 곳도 다양해서 진료실에 앉아서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을 듣게 된다. 군의관이 군대 소식을 두루 아는 것처럼 진료실 안에서도 세상 밖 소식을 알게 된다.

 지난번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선거 결과는 하나인데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그 해석이 다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진료실에서 보고 들은 세상은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이 지방선거 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살기 힘든 세상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을까? 젊은 부부라고 왜 그들도 애기를 갖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제발 애기를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항의.

 학원 보내고 과외 보낼 돈이면 차라리 그 돈으로 애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이라고 낯선 외국에서 설움 받아가며 가족과 떨어져 불안한 생활을 하고 싶겠는가? 국내에서도 큰 돈 안들이고 애들 공부시킬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 어렵게 대학에 입학하고 외국 어학연수를 다녀오고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 전 재산을 털고 빚을 내어 시작한 사업이 경기 불황으로 길거리에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절박함, 대책 없는 노후로 외롭게 죽음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노인들의 불안, 이런 것들이 모여 선거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의료계는 얼마 전에 의사협회장과 병원협회장을 새로 뽑았다. 하고 싶은 일이 많겠지만, 과거사 들추기나 이념 논쟁을 떠나 현재 살기 어려운 의료계를 살만한 의료계로 만들어 주기를 부탁드려본다.

저작권자 © 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