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岸이 기암절벽·수목으로 울창한
양자강 지류 선농계곡 '仙境' 방불
船上관광시 웅대함·아름다움 동시 만끽

중국에는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 많다. 계림을 비롯하여 장가게 삼협(三峽)의 선유관광 등은 유명한 관광코스이다. 삼협을 관광하려면 무한(武漢)에서 유람선을 이용 장강(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성까지 수상관광을 즐기는 코스와 반대로 중경에서 무한까지 유람선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다. 모두 2박3일이 소요된다. 필자는 전자의 코스를 택하였다.

중국의 장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 티벳트에서 시작, 황해까지 전장 6,000여㎞나 되는 긴 강이다. 만년설이 녹아 물이 되어 강을 이루고 깊이 패인 심산 계곡을 사행(蛇行)하면서 계곡에서 뛰어내려 폭포를 만들고 기암절벽을 지나 유유히 평야로 흘러가는 장강, 너무 넓어서 강이라기 보다 대륙을 흐르는 바다라고 볼 수 있다.

삼협은 장강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3개의 구간에 협강(峽江)을 이루어 마치 병목과 같이 좁아졌다가 또다시 대하(大河)를 이루는 세곳이 있다. 좁아진 곳에는 단암절벽(斷岩絶壁)을 이루고 물살이 세고 넓은 곳은 산이 화려하고 물살은 죽은듯이 유유히 흐른다. 웅대한 최당협, 아름다운 우협(巫峽), 급류로 유명한 서능협(西陵峽)을 통과하는 배 소리는 흥분과 재미와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양안(兩岸)의 기암절벽 앞을 흐르는 강물은 유유히, 때론 물살 세게 흐르는 광경은 시나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고 그저 꿈만 같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삼협은 웅대한 장관으로, 때로는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감동케 하였다. 옛적부터 문인묵객(文人墨客)이 많은 시를 남겨 이 시문을 감상하려고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그중 유명한 것은 대시인 굴원(屈原)이 지은 유비황제가 도원의 3형제와 함께 제갈공명앞에서 그의 두 아들을 그(유비)가 죽은 후 잘 부탁한다는 동정과 애정어린 서글픈 시를 백제성에 남겨 유명한 역사적인 시로 남아있다.

그외 삼협은 풍부한 자연경관과 인문경관(人文景觀)으로 이백, 두보, 백낙천, 소동파, 범성대 등 위대한 시인들이 남겨놓은 시가 많다. 요사이 와서는 시인, 문필가, 사진가, 예술가, 조각가, 호사가들이 모여 들게 되었다. 1994년 당시 이붕(李鵬) 수상은 삼협 댐건설을 선언했다.

건설이 시작된 후 삼협댐은 꿈이 아닌 현실로 접어들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수리 프로젝트로서 삼협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댐은 서능협에 이루어진다. 완공한 후 수위는 100m로 많은 아름다운 경치가 1년 후 수장되고 만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선농계곡의 관광은 너무나 추억이 남는다. 선농계곡은 장강의 한 지류이다. 장강은 황하와 더불어 누런 흙물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선농계곡의 물은 우리나라 강물처럼 맑고 깨끗하기로 유명하다. 양안의 기암절벽에 푸르고 아름다운 수목이 울창하여 신선한 선경을 방불케 한다.

지방 농민으로 구성된 선원 5~6명이 조그마한 배 한척(정원 13명)을 강구(江口)에서 부터 계속 물살 센 이 강을 역행하여 올라간다. 밧줄을 이용하여 사람힘으로 끌고 올라간다. 발동기는 수질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금하고 있다. 그 옛날 압록강의 모터보트가 생겨나기 이전에 배를 중국인들이 끌고 올라가는 뱃사공의 노고를 회상케 하였다. 물살을 이용하여 좌안(左岸)에서 끌다가 때로는 우안(右岸)에서도 끌게 된다. 뱃사공의 신출귀몰, 좌충우돌, 임기응변하는 묘기로 배는 무난하게 상류까지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다.

농민들이 부업으로 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은 고도산업화로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과학기술도 우리나라를 따라오려고 하고 있다.

나는 중국의 심산유곡에서 노예와 같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에 감동되었다. 끈질긴 중국사람들이 우리를 누르고 상위에 오를 사회가 온다면 그때가 두려워진다. 우리들의 자손이 중국사람을 태우고 배를 끌어야 할 시대가 온다면 보따리를 거꾸로 짊어질 시대가 오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무한 주위의 박물관 2곳을 관람했다. 이집트 박물관을 보면 그들의 선조가 우리보다 앞선 문화생활을 해왔음을 느끼고 그 문화가 유럽과 동양에까지 영향을 주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 나라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중국 박물관 또한 그러한 인상을 준다. 석기시대, 철기, 청동시대에 그 선조가 우리보다 훨씬 문화가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돌고 돌아서 지금은우리가 서양문화와 과학기술을 빨리 받아들여 현대화된 국민이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는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남성 박물관의 '미이라'는 신비스러움을 비할 수 없다. 1975년 마왕추 무덤에서 발굴한 한대(漢代) 귀부인의 유체임과 동시에 1,000점에 가까운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의 미이라는 딱딱한데 비하여 중국 미이라는 피부와 근육이 산 사람과 같이 부드럽고 관절도 생사람의 관절과 같이 움직여진다고 한다.

철관에 진공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한다. 그 당시보다 현대가 과학기술이 앞섰다고 하지만 도저히 이해못할 신비한 사체보존 방법이다.

중국의 사회생활은 어떠한가. 무엇보다도 중국은 인구가 문제이다. 중국은 땅이 넓지만 또한 인구도 많다. 도시에 가던 농촌에 가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국정부는 인구정책으로 부부한쌍에 어린이 한명 낳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둘 낳으면 호적에 입적이 안되고 벌금으로 한화 100만원을 납부하게 된다. 그래서 타지방에 나가 어린애를 낳아서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이것으로 '출산 유격대'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남아 선호사상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이다. 이 출산유격대가 요즘와서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호적에 입적이 안되면 의료보험과 교육비 혜택이 없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비가 비싸게 든다. 우리나라의 과외공부(사교육비)와 같이 소요된다.

중국의 가족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이 핵가족이며, 부부상화(夫婦相和) 이혼율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적다. 부인은 가정에서 남편의 지배적 위치에 있다. 남편은 당번때 부엌일을 해야 한다. 부인이 남편보다도 외출과 사치와 경제적인 자유가 있다고 하니 여성상위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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