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re와 Managed care

- 메디케어 탄생 -

“미국노인들이 현대의학의 기적적인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일은 이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일생동안 알뜰히 저축한 돈이 질병 때문에 없어질 우려도 없어지고, 남은 여생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지내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병든 부모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자기들 수입과 희망을 희생해야 하는 일도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

1965년 8월 미국 역사상 최초의 공적(정부차원의) 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어 설립법에 서명한 존슨 대통령의 말이다. 루즈벨트 대통령(FDR 1930년대)때 `사회보장법'을 탄생케 한 민주당의 이상주의가 30년이 지난 후 뉴프론티어의 기수 케네디(JFK)에 이어져, 그는 국내개혁의 첫 과제로 노인의 의료복지 실현에 착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러나 JFK의 이상은 존슨에 계승되었으며, 능숙한 정치역량을 지닌 존슨은 그의 선거전에서 유권자의 22%라는 노인층(60세 이상)을 의식하면서 `위대한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노인 의료보장을 약속하며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메디케어를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을 확보했다.

메디케어 입법조치는 부분적 NHI(국민개보험)실현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조치에 의해서 국민 의료서비스의 `보편적 이용'과 `비용절감'을 위하여 우선 65세 이상의 노인과 저소득층(Medicaid)만을 커버하는 의료보험제도가 성립되었으며, 장차 전국민에게 확대 적용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Medicare란 글자 그대로 Medical care(환자의 치료)이며, 우리가 흔히 부르는 메디케어는 정부 주도하에 국민의 치료비용을 부담하는 제도를 말한다. 현재 미국은 전국민의 24%(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가 의료보장대상자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일반국민은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그리고 인구의 16%에 해당하는 4,400만명이 `무보험자'로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면 전번 글에서 미국의 실패한 NHI(100% 메디케어)를 논했으니, 이번에는 성공한 메디케어(부분적 NHI)를 좀더 논해 보기로 한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 1960년대 초기에는 미국 노인의 절반이 `무보험자'였으니, 그들은 고령과 기존질환 등의 이유 때문에 보험가입이 거절되거나, 또는 젊은이에 비해서 훨씬 비싼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의료보험제도를 시장원리에 맡겨두면, 노인과 신체장애자 등 의료의 필요성이 높을수록 재력이 미약한 사람들은 의료보험을 갖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시장원리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위한 공적의료보험제도가 절실했다. 당시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선진국가는 이미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적의료보장제도가 있었다. 이때 나타난 “각국 의료제도조사”에 의하면 NHI를 실시하고있는 여러 선진국은 평균수명과 유아사망률이 미국보다 양호하며, 그 나라국민의 90%와 그곳 의사의 60%가 NHI에 만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미국의 국내실정은 인권신장으로 의료가 생활에 불가결한 `만인의 권리'라는 사회적 인식이 보급될 때이기도 했다. 여기서 노인과 빈곤층은 국가적 의료보장이 가장 필요한 두 집단이었다. 1960년대 초기엔 65세 이상의 2/3는 평균수입이 빈곤층 범위에 속했다.

메디케어 심의가 시작되던 1961년의 국회공청회 기록에는 “노인환자는 의료비지불이 불가능한 자가 대부분이며 복지구제(Welfare)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 이것이 병원재정 곤란의 주원인이 되고있다”라고 지적돼 있다. 이때 여론조사에 의하면 전국민의 2/3 가 “노인의료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자기네 소득에서 지출하는 사회보장세율을 올려도 좋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케네디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노인의료보험제도안”의 심의를 의회에 요청하여 노인을 위한 의료제도의 실현에 착수했다. 의회의 가장 유력한 법안은 `연방정부직할의 연방보험제도'였고 이 안은 `병원입원비보험' `의사의 진료비보험' 그리고 `빈곤자 대상의 의료보조' 등 3가지 골자로 이루어졌다.

- AMA 반대와 타협안 성공, 그리고 거부반응 -

여기서 가장 강력한 그룹인 AMA(미국의사협회)는 초기에 보험대상자로 `빈곤자 대상의 의료보조'만을 찬성했었다. AMA의 견해는 `국민의 권리'로서의 의료라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며, 공적의료는 어디까지나 `자선'으로 베풀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의회에서 AMA가 요구한 “연방정부는 의료내용에 간섭하지 않는다”, “의료측은 치료비청구를 자유로이 설정할 수 있다”는 조건을 받아드렸으며, 또한 정치가들은 “메디케어 지정의가 되는 것은 의사각자의 의사에 맡긴다.

그리고 메디케어 제도 이용은 의사주도하에 감시한다”는 AMA의 주장도 수용했다. 그래서 의회안과 AMA안을 절충한 타협안이 작성되어 의회통과 가능성이 무르익었다.

애당초 AMA는 “연방정부가 직영하는 어떠한 건강보험제도도 반대한다”는 의향이었으나, 변화하는 사회조류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 인종차별철폐와 빈곤퇴치 등 사회개량의 자유주의 목청이 높은 때라 이 사회조류에 대항하는 것은 대중의 지탄을 받는 일임을 AMA는 의식하고서 그들의 주장을 양보하고 차선의 길을 찾아 정부에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치가들도 가장 영향력 있는 AMA 요구를 존중하며 그들에게 `이익제공과 전문직 존중'이라는 당근을 내세워 타협안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사실 타협이 이루어지기까지 AMA는 당시 금액으로 5천만달러이라는 거액을 메디케어 반대운동에 투입했었다.

장기간 총력을 다하여 메디케어 반대투쟁을 했던 AMA는 공교롭게도 이 법안이 발효하던 날(1966.7.1) 시카고에서 제115차 연례 AMA 총회가 개최되고 있었으며 총회의 주제는 전적으로 새로운 당면문제인 메디케어에 대한 대처방법이었다.

의사들 의견을 최대로 절충한 타협안을 성취하는데 공로가 컸던 중도파인 AMA 회장(클리브랜드의 내과의 Hudson박사)은 메디케어 시행으로 인해 의사들에게 닥칠 시련에 대비해서 대의원들에게 낙관론을 펴며 자중하기를 권고했다.

“의사들에게 최후의 심판이 다가온다고 낙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옳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 우리는 실망할 것이 아니라 새 프로그램을 최대로 선용할 것”을 제언하며 “그것이 장차 NHI로 확대되는 것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했다. 의사들은 메디케어의 두 지불방식에 관심이 컸다. 두 방식은 1. 의사가 환자에게 의료비명세서를 주고, 환자는 소정의 의료비를 의사에게 먼저 지불한 다음 환자가 직접 정부에 청구서를 보내 지불금액을 환불받는 방식과 2. 환자들의 일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의사가 정부기관에 청구해서 지불 받는 방식이다.

물론 여기서 면책금액(Deduction)과 20%의 일부 부담액(Copayment)은 환자부담이다. 그리고 여유있는 부자환자에게는 소정요금 초과액을 더 요구할 수도 있으나, 정부에서는 수락하는 자에게만 더 청구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지불방식에 있어서 회장의 권고(2 방식)는 투표에서 부결되고 전AMA회원은 환자한테 선불받는 1방식을 찬성했다(주:현재는 2방식이 통용됨).

이와 같이 메디케어 타협안의 통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태도는 메디케어에 부정적이었으며 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이 사실을 실증이나 하듯 다음번 AMA 회장에는 메디케어 반대의 강경파이자 극우파의 대변인 Rouse 박사가 선출되었으니, 그는 극우기관인 H. L. Hunt's Life Line Foundation의 전직 회장출신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의사들이 메디케어에 적응하는데는 장구한 시일이 필요했었다.

- 메디케어 공청회 -

노동단체들은 AMA와는 반대로, 메디케어 법안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다.

노동자들에겐 이 안이 퇴직후의 불안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65세 고령노동자가 기꺼이 퇴직할 수 있게 함으로써, 학교를 나와 노동시장에 들어오려는 수백만 명의 이 나라 젊은이들을 맞이하려고 한다”는 말은 당시의 민주당 상원의원 알버트 고어(이번 대선에서 억울하게 패배한 고어의 아버지)의 공청회 발언이다.

메디케어(메디케이드 포함)에 관한 공청회에서는 의료급부의 내용보다는 비용문제에 논의가 집중됐다고 한다. 여기에 관해서는 메디케어 재원으로 `사회보장법'의 선례가 있었다. 즉 1935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서 실현된 `연금'의 재원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거출금의 적금으로 충당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연금급부'를 받는다는 사실은 자기가 일해서 저금하고 획득한 권리를 말하며, 결코 정부의 자선이나 동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가 확립돼 있었다. 사실이지 의회에 상정한 메디케어법안의 공식명칭도 “1965년도 사회보장법 개정안 Social Security Amendments of 1965”라 일컫는 메디케어와 퇴직연금법의 총괄적 법안이었다.

법안심의에서 다음 3가지 전제조건도 확인되었다.

1. 입원보험(Medicare A)의 재원은 `사회보장법' 적용자의 소득에서 거출 충당한다. 2. 외래 및 의사요금보험(Medicare B)의 재원은 가입자의 보험료와 연방정부의 일반세입으로 충당한다. 3. 빈곤자 대상의 의료보조제도(Medicaid)의 재원은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일반세입으로 충당한다.

이러한 타협과 과정을 거처서 메디케어는 1965년 여름 의회를 통과하여 1966년 7월1일 발효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메디케어는 연간 65억 달러의 예산으로 시작하여 65세 이상의 노인(당시 1,900만명)과 그리고 연령에 제한 없이 신장부전환자 및 신체장해자의 의료비를 연방정부가 커버하는 의료보험제도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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