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안락사' 현황

여기서 언급하게될 `적극적안락사'명칭은 앞장의 `존엄사'와의 혼동을 막기 위해, `의사의 자살방조' 즉 Physician-assisted suicide의 약자인 PAS로 통일할 것임을 미리 알려둔다. 미국에서의 PAS허용운동은 비교적 진보적인 주라고 할 캘리포니아, 워싱턴, 그리고 오리건주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워싱턴주에서는 1991년 11월에 `Initiative 119'라 칭하는 `PAS권리를 인정받는 법안'을 주민투표까지 이끄는데 성공했으나, 투표결과 찬성 46% 반대 54%로 PAS법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1년 후 캘리포니아에서도 마찬가지 법안인 `Proposition 161'가 주민투표에 올랐으나, 여기서도 찬성 47% 반대 53%라는 근소한 차로 PAS법제화에 실패했다.

오리건주에서는 1994년 주민투표에서 PAS 법이 통과되어 미국서 최초로 PAS를 허용한 주가 되었으나 미국내의 반대여론이 들끓었다. 그후 3년간 위헌시비를 비롯한 많은 논란 끝에 1997년 10월 대법원의 `합헌 판결'을 거처 드디어 `Death with Dignity Act 존엄사 법'를 제정했으니, 이 법은 우리가 말하는 '존엄사'와 더불어 PAS 권리도 인정한 세계 최초의 `안락사 법'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오리건주의 법무장관은 이 법에 대해 “환자에게 안락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권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대통령도 선출할 수 있었다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법원의 합헌판결로 PAS반대파의 목소리는 낮아졌으나, 강력한 권한을 갖고있는 미국DEA(The Drug Enforcement Administration 미연방 약품관리국)국장은 “오리건주에서 PAS를 위해 약물 처방하는 의사는 약물면허증을 박탈당할 수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그러나 미국 법무장관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명함으로서 오리건주의 PAS법은 이제 확고부동하게된 느낌이다. 그래서 오리건주는 최근 PAS법을 확정한 세계최초의 나라 네덜란드보다 3년 앞선 `안락사 선진지역'인 셈이다.

PAS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의 여러 주(현재 37주)에서는 PAS를 2급 살인죄로 다스리는 엄한 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안락사 금지법이 위헌이라는 소송에 대해서 미대법원은 만장일치로 `주 당국의 안락사 금지권한 합법 인정'이라 판결했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문에서 “미국인들은 안락사의 도덕성, 합법성 등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도있는 논의를 계속할 수 있다”고 했으니, PAS 문제는 오리건주를 위시한 각주의 독자적인 여론을 수렴한 결과를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현재 미국 51개 주를 PAS 대처 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4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 주법에 의해 합법화
1주(오리건)

▲ 주법으로 범죄처벌
37주(뉴욕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텍사스 등).

▲ 관습법(불문율)으로 범죄처벌
10주(미시건 오하이오 등)

▲ 확실한 처벌법이 없음
3주(유타 와이오밍 노드-캐럴라이너)

여기서 보다시피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PAS 행위를 범죄시하여 처벌하고 있으니, 그대표적인 예가 한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의사 케보키안(Kevorkian) 사건이다.

현재 72세인 그는 미시간주의 병리전문의사이며 1982년 은퇴이후 자기의 소신인 PAS를 실천에 옮기려 해왔다.

케보키안은 1993년 11월에 PAS 행위로 첫 기소되어 실형을 받은바 있으나, 그는 복역중 이 `부도덕적인 법'에 반대하는 단식투쟁결과 건강이 악화되자 다시는 PAS를 시행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가석방된 바 있다. 그후 3번이나 같은 죄목으로 유죄판결 받은바 있으나 집행 유예되었으며, 안락사 십자군을 자칭하는 그는 과거 9년간 130명의 말기환자를 도와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1998년 9월 그는 한 환자에게 치사량의 약을 주사하여 PAS를 시행하고 그 현장을 녹화하여 2개월 후 CBS에서 방송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에 2급 살인죄로 기소되어 10~25년형을 선고받고(4/14/99) 현재 복역중이다. 이때 재판장은 말하기를 “이 재판은 안락사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옳고 그름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라, 불법행위에 대한 것이다”고 했다.

재판결과에 대한 당시 여론은 PAS에는 반대지만 살인죄에 대해서는 거부반응(66% 반대)을 보이고 있다. 말기환자를 가장 많이 취급하는 암 전문의 3천2백명을 대상으로 한 미국암학회의 조사에 의하면 그들의 22%만이 PAS를 찬동하고있다.

30만 명 의사들을 대표하는 AMA서도 1999년 총회에서 500명 대표들이 PAS반대성명을 발표했고, PAS대신 말기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The Pain Relief Promotion Act 진통치료 촉진법'을 국회에 건의하여 통과됐다. 그리고 AMA 윤리위원회에서 “PAS는 비윤리적이며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역할에 정 반대되는 행위이다”고 규정지었다.

전국적 조직체인 CMDS(Christian Medical & Dental Society 크리스천 의사-치과의사회)는 케보키안 판결을 대환영하고, 정부와 국민에 대한 PAS 반대운동에 1만3천명 회원들이 앞장서고 있다. 미국의학계의 지도자인 전 연방 보건원장 Koop박사도 성명서를 통해서 “의사가 병 치료하는 자인 동시에 살인자가 되는 것을 우리사회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언명했다.

미국교회연합회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인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파멸케 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크리스천 양심에 어긋난다 하여, 의사에 의한 자살방조의 법제화를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미국 루테란교회에서 발행한 장문의 교서 `End-of-Life Decision 생명종말에 관한 결정'에는 PAS에 대해서도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니, 그 일부를 소개하자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위적으로 파괴하는 일은 우리 크리스천 양심에 위배된다고 우리교회는 확신한다…우리는 환자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살해되는 것을 허용하는 PAS 법제화를 반대한다…환자말기에 하스피스 요법이 보다 인도적인 치료를 약속해준다.…”

이상과 같이 미국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PAS반대 세력의 의견을 소개했다.

그러나 오리건주에서 법제화됐을 정도로 미국의 PAS 추진세력도 만만치가 않다.

미국에는 PAS 법제화의 가장 큰 추진세력인 미국안락사협회가 있다.

1980년 창설된 이 모임은 헴록회(Hemlock Society)라고 부르며, Hemlock은 고대 희랍에서 자살용으로 쓰였던 독초 이름이다. 창설자인 험프리(Derek Humphry)는 1992년 그의 베스트셀러 책 Final Exit(안락사 방법)에서 “안락사 법(PAS 포함)이 보편화되면 심한 불치병이나 노인종말환자의 딜레마를 다룰 수 있는 길이 트인다…PAS가 가능하면 불구자나 예외적 질환도 다스릴 수 있게될 전망도 있다…”고 했을 정도로 PAS 적극 찬성자다.

험프리는 그의 책에서 암으로 고통받던 자기 처의 죽음을 도운 자신의 체험을 말하면서 법의 처벌을 교묘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히 알렸으며, 마지막 길(Final Exit)로 죽음을 선택한 환자는 강력한 치사량의 수면제를 입수해서 복용한 다음 비닐주머니를 덮어쓰고 죽는 방법을 권장했다. 그리고 의사는 약을 직접 투여한 사실만 없으면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쉽게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이 자상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이 책은 현대의학에 방치된 말기환자에 대해 온정과 동정에 넘치는 선물이라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PAS의 시행자가 될 의사들이 PAS를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들이 교육받아온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영향이기도하다.

여태까지 의료문제에 있어서 결정권은 환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의사의 권한에 속한다는 독선적 사고방식이 지배해왔다. 이러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만 충실한 의사들에 반대해서, 미국에서 싹튼 새로운 `생명윤리운동'이 일어났다.

미국인권운동은 의료부문에도 발전되어 환자의 의견을 무시하기 마련인 '의사가 주도하는 의료'에 비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안락사 등 생사에 관여된 많은 문제점을 학술적으로 다루는 `Bioethics 생명윤리'라는 새 학문이 확립되었으며, 실제 이일을 담당하는 학자들은 의사가 아닌 철학자, 윤리학자와 법학자들이 주다.

생명윤리운동을 `바이오-에딕스'운동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돋보이는 두 가지 면이 있으니 하나는 죽는 방법은 의사가 아니라 본인이 정할 것, 다음은 의학을 과학기술의 일부에 국한시키지 않고 생명윤리라는 큰 테두리의 학문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운동결과 안락사, 존엄사, Informed Consent(충분한 설명을 통한 환자동의)등등이 다루어졌으며 여기에 진보적 인사들의 영향이 커지면 PAS 법제화도 여러 주에서 가능하리라고 본다.

현시점에서는 미국 여러 주에서 PAS가 합법화할 수 있는 날은 여론조사의 지지도가 80%에 이르는 날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나 그날이 과연 올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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