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조선은 지식인이 지배하는 사회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화기이전의 조선인물들 책을 읽는 가운데, 깜짝 놀랄 식견과 선견지명을 지닌 선현들을 자주 접하며 과연 우리조상은 위대한 분이 많았다고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중에서도 이씨조선시대 의학도가 아니면서도 우리나라 의학의 후진성을 개탄한 연암 박지원의 한 단면을 여기에 소개하고자한다.

조선외교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여행기행문 '열하일기 熱河日記'를 쓴바있는 연암은 조선후기의 으뜸가는 실학파 학자이다. 그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조선의 개화에 눈뜬 대표적 인물중의 한 분이다.쇄국의 암흑시기였던 조선사회에서 그가 보인 외국서적에 대한 탐구욕과 조국개화에 대한 정열을 접할 때, 마치 캄캄한 밤하늘에 선 듯 비치는 번갯불을 연상하듯 너무나 실리(과학)적이고 서구적 안목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씨조선을 지탱해온 절대적 사상인 주자학에서의 이탈이나 그에 대한 비판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사상에 배반하는 역적)으로 매도되는 사회에서, 외국학문에 대한 향학력을 바탕으로 한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은 우리조선의 개화에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열하일기'를 읽어가면서 필자를 더욱 감탄케 한 것은 그가 중국 땅에서 외국의학(醫學)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에 관한 책을 구하려고 무던히 애썼던 장면이다.그 내용의 글을 옮겨본다.

< 우리나라는 의학수준이 낮은데다가 약재마저도 많지가 않다.--- 열하에 있을 때 이점에 대해 느낀바 있어 전문가 한 분에게 물었다. "근래 의학서적가운데 새로운 처방이 실린 책으로 사갈 만한 책이 있습니까?" "근세에 일본에서 발간한 '소아 경험방'이 가장 좋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원래 서양에 있는 화란사람들이 저술한 책이라고 합니다.-----" 나는 북경으로 돌아와 화란인의 저술인 '소아 경험방'과 서양책인 '수로방'을 사려고 서점으로 돌아다녀 봤으나 없었다.------ >.

몇백년 전 일본에 서양의학인 란의학(蘭醫學)이 있었다는 사실을 현대한국지식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2백년 전 쇄국(鎖國)나라 조선의 유교선비가 이 '란의'에 주목하여 란의학책을 찾아 해맸다는 사실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그의 강한 집념을 말해준다.외교사신으로 중국 나들이하면서 조국개화를 위해 외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문물, 그것도 자기 전공과 거리가 먼 의학서적마저 구하려는 그의 애국심에 감탄한다. 근래 국민의 혈세로 외유하는 한국선량들의 불미한 일들이 자주 보도되나, 연구자료 수집해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옛 선비는 일본서 만든 '화란의학서적'이 중국에 수입, 번역되어 이름높은 의학서적으로 정평이 나 있음을 주목했던 것이다. 야만국 왜국(倭國)이라고 일본을 무조건 멸시하던 다른 유학자와 다른점이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여기서 옛 일본의학을 잠시 소개하자면, 일본은 발달된 서양의학 기술을 화란(和蘭 홀랜드)에서 수입하여 내과 소아과는 물론 외과 안과 등도 서양의학 혜택을 받고있었으며, 따라서 동양에서는 지금처럼 최첨단을 걷는 의학수준의 나라였다. 개화기 훨씬 전의 이야기다.

원래 옛 일본도 우리 이씨조선 5백년과 같이 쇄국주의나라였다. 그러나 조선과 다른 점은 '나가사끼 長崎'라는 조그만 자유항을 개항하여 그곳에서 선교에 관심 없는 외국인 화란과 무역을 했으며 그곳을 통하여 서방세계의 학문과 정보를 얻고 있었던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씨조선 5백년이 캄캄한 상자 속에 갇힌 시기였던데 비해, 쇄국일본은 나가사끼라는 바늘구멍을 통해서 상자 속에 바깥세계의 햇살이 가냘프게나마 들어오던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의 선구자들은 이 바늘구멍 빛을 통해서 개화에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끈질긴 노력을 했으며, 여기서 생겨난 학문이 다음 말하려는 일본의 란학(蘭學) 즉 홀랜드 학문이다.그런데 캄캄한 나라 조선서 온 외교관인 연암이 란학과 접할 수 있는 길은 란학의 중국번역서를 찾아 암중모색하는일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우리조선 선비 모두가 연암선생 같이 일본인의 신학문을 향한 왕성한 학구열을 본받아야만 했었다. 그것이 일본의 선진화와 나아가서는 경제대국과 세계열강이 되는 밑거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조선은 그러하지 못했다. 과거 조선과 일본 통신사의 행적을 살펴봐도 너무나 달랐다. 일본 사신들은 조선에서 행동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있는 이름있는 서적은 모조리 구해서 일본서 출판했다.반면 조선사절이 일본서적을 구해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왜국 땅에서 오직 유교학자라는 입장에서 뽑내기만 하고, 일본인의 언행이 주자학 예법에 맞고 안맞고 하는 비평가행세가 전부였다고 한다.

란학 이야기로 되돌아 가본다. 지금부터 4백년 전(서기 1600년) 유럽의 신흥국가인 홀랜드의 상선이 일본의 나가사끼 항구에 입항했으며 그곳에서 무역관 설치허가를 받았다. 마치 북한이 선봉지구를 개항하는 격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알고자하는 많은 지식층인사들이 외국어(화란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신학문에의 붐이 일어났다. 여기서 화란어공부를 막 시작한 의사(한방의) 몇 사람이 서양책 '해부학도본'에 나온 인체해부도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 일본 란의(蘭醫)의 선구자인 수기다(杉田玄白)라는 한의는 우연한 기회에 사형수의 시체해부에서 보여준 실물과 '화란 해부학 그림'이 완전 일치함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화란어를 학습하는 몇 동료와 뜻을 같이하여, 가진 고생 끝에 사전이나 전문가의 도움 없이 해부학 도본을 번역해서 '해체신서 解體新書' 란 이름으로 책을 간행했으니 1774년의 일이다.

이때 조선은 신학문은커녕 고루한 유학자들의 4색당쟁 시대였는데, 여기서 일본인의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의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해체신서' 책의 출현이 일본의 '란학', 그 중에서도 '란의학'의 효시라 하겠다. 수기다는 그의 만년에 번역당시를 회상하면서 "돛대도 없이 배를 태평양에 띄운 거나 다를 바 없어 그저 망여자실할 따름이었다" 고 술회했다.홀랜드는 유럽의 자그마한 나라인데도 해외무역으로 한때(4백년 전) 세계에서 가장 극민소득이 높은 나라였으며 상공업이 가장 융성한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러시아의 피터 대제(大帝)가 그곳에 발달된 조선술(造船術)을 직접 배우고자 홀랜드를 방문했던 일은 잘알려져 있으니 3백년전(1697년)의 일이다.

미개국 러시아의 주인으로서 조국 근대화에 야심만만했던 피터대제는 그곳 의료계시찰도 했다. 화란이 낳은 세계적 화가 램브란트의 그림 '톨프교수의 해부학강의'로 유명한 바로 그 해부학교실에 찾아가서 인체해부를 직접 견학했다. 이때 그를 수행했던 귀족 2명이 시체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자 "조국 근대화를 싫어하는 놈"이라고 그들 입에 시체근육을 집어넣어 처벌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야기를 되돌려, 나가사끼에 머문 열 몇 명의 화란인의 영향이 일본인 유지의 손을 거쳐, 후진국 일본의 개화에 크게 공헌했음은 문명사상의 기적이라고도 하겠다.

옛 중국 한의학은 '음양오행설'에 의거하며, 인체의 내장은 '5장6부' 밖에 없다고 했다. 한의학은 관념의 학문이었다. 한의사는 의사가 되기 전에 유교의 '음양설'부터 마스터해야했다.

란의학의 출현(1774년)이래 일본의 많은 재래의(한방의)들은 관념 아닌 사실, 즉 과학을 추구하는 란의(蘭 )로 개종했다. 개화기 이전에 이미 여러명의 홀랜드 의사들이 일본의학 교육에 관여했던 사실도 특기할만하다. 그래서 1858년 동경에 란의의 관립의학교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2백 몇십년전 '란의학'으로 일본땅에 서양의학의 틀을 잡은 그들은, 명치유신이후 독일의학으로 변신해갔다. 란의학이 주로 독일의학의 번역학문이고 독일의학이야말로 당시에는 세계최고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전의 동경의학교는 1877년 동경대학 의학부로 개칭되어 새 출발했으며 이때 교사들은 모두 독일의사였으며 독일어로 강의했다고 한다.( 주: 정부에서 지불하는 외국교사의 연봉은 총리와 같았다고함 ).

명치유신 즉 일본개화기 초기에는 신 의학교육기관의 부족으로 한방의 숫자가 전체 의사의 8할을 차지했지만, 애당초 일본정부는 국민의 보건담당을 '서양의 일변도'로 몰아갔던 것이다. 근대화 국제화의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즉 1875년 제정된 의사국가시험 과목이 전적으로 서양의학 일색이 됨으로서, 한방의는 기득권만 인정받아 개업하는 불안한 존재가 되었다. 의사시험도 국가시험으로 통일했다.

유일한 한방의학교도 1883년 의료법개정으로 문을 닫게되었다.

여기에 한방의는 전국적으로 결속하야 정부의 서양의 편중정책에 저항해 봤지만, 국민보건 근대화에의 의지가 굳은 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한방의의 최후의 로비이자 필사적인 청원으로 1895년 '한방의 존속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건만 부결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장래를 위하는 그들 국회의원들은 어느 나라 의원들처럼 한방의 편을 들지 않았다. 그 결과 합법적인 한방의는 19세기에 일본서 영원히 자취를 감춘 셈이다. 이러한 결과는 조국의 과학입국과 국제화 그리고 국민 보건향상을 위한 신념 굳은 정부지도자와 실무자들, 로비에 흔들리지 않고 공부하는 국회의원들, 그리고 국민을 계몽하고 정부를 설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의료계지도자와 의학자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라 할 것이다.

란의학으로 씨뿌리고 뿌리내린 일본의학은 그후 독일의학, 미국의학으로 접목되어 현대의학이라는 거목으로 자랐으니 그 혜택은 바로 국민이 차지한다. 일본이 건강수명 최장수국이 된 연유가 여기에 있으며, 이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일본의학은 탄탄대로에 놓여있다고 할까!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밀릴세 잎이 무성하고 백화만발하기 때문이다. 몹시 부러운 일이다.

2백여년 전 우리의 선현 연암선생은 캄캄한 쇄국 조선 의학의 후진성을 한탄하며 낯선 중국 땅에서 야만국 일본의 란의학에 주목하야 그것을 찾아 암중모색하였으니, 국민보건 백년대계를 염려하며 조국근대화에 공헌하고자 했던 그 애국심에 우리는 다만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오늘의 의료대란을 예방하려는 선견지명을 지녔던 우리의 선현 연암 박지원선생을 생각해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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