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갑범 저

의학신문사 | 2014-12-30 | 0원

평생 의학교육자로 당뇨전문 임상가로 살아온 허갑범 연세대 명예교수(허내과의원 원장)가 수십 년 전부터 의학교육의 발전적인 개혁을 주창하며 각종 매체에 기고하고, 언론 인터뷰에서 강조해 온 의학교육에 대한 철학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의료의 세계화-의학교육 개혁이 열쇠다’란 제하로 묶여진 이 책은 칼럼과 인터뷰 모음집이지만, 글 한 편 한편에 실타래처럼 엉킨 우리나라 의료문제를 올곧게 해결하고, 의료가 장차 국가의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기능해 나가는데 필요한 길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길은 궁극적으로‘의학교육이 변해야 된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것은 저자가 20년 전인 1994년에 쓴 칼럼 ‘21세기를 대비한 의학교육’이다. 이때 허갑범 교수는 이미 의료현안들을 적시하며“의료가 21세기 국제화, 정보화시대에 대비해 나가기 위해서는 의학이 생명과학발전을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인재 양성에 나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학교육을 혁신해 의과대학을 의과학자는 물론 의학지식을 겸비한 법률가와 행정가 등 다양한 전문가를 길러내는 산실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목이다.

허 교수는 의료의 활로를 제시한 이 글부터 지난 20년간 각종 언론 인터뷰와 신문칼럼 등을 통해“현재와 같이 건강보험이란 울타리가 쳐진 의료체계의 틀에서 벗어나 의료와 의사들이 기능과 역할을 높이고, 우수한 두뇌집단으로서 국가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고식적인 의학교육의 틀을 깨야 한다”고 줄기차게 외쳐왔다.

전체적으로 이 책에 담긴 허 교수의 말과 글은‘상위 0.1%의 우수한 두뇌들이 한 결 같이 임상의사가 되어 장차 어찌하자는 건가’라는 걱정이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의학교육계가 다양한 인재를 길러낼 수 있도록 학제를 다양화 시켜나가야 된다’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 길이 ‘의학전문대학원’이었다.

그렇다고 허 교수가 획일적으로 의학전문대학원 도입을 주창한 것은 아니다. 칼럼을 통해서도 강조했지만 허교수의 철학은 아주 명쾌하다. 허 교수는 의과대학의 기능을 환자진료에 필요한 우수한 의사 양성을 우선으로 삼고 있다. 의생명과학 발전을 이끌 의과학자를 길러내는데 힘을 쏟자는 얘기는 어쩌면 그 다음이다. 즉, 수많은 의사인력 중 적어도 일정한 수준은 의과학자로 길러내 신약개발 및 의료기술 개발에 나서도록해야 국가경쟁력이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임상가들에게 돌아갈 파이가 커진다는 얘기다. 의사 모두가 살고, 의사들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며, 의사의 역할을 존중받을 길을 찾자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전문대학원은 모든 의과대학에 적용할 일이 아니라, 대학의 특성과 여건에 따라 자율적으로 MDphD 복합학위과정을 선택하여 도입하는 방안을 제안했던 것이다.

허갑범 교수의 이 같은 주창에도 그간 의학전문대학원은 제도 도입과정에서 큰 역경이 있었으며, 본질과 달리 제도가 시행되었다가 최근에 와서는 대부분의 의학전문대학원이 과거 의과대학 체제로 되돌아가는 등 지지부진한 정책이 되고 말았다. 이에 저자로서는 힘이 빠질 만도 했지만 지금도 의학교육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굽힘없이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허 교수는 최근의 칼럼에서도‘의학교육이 변해야 된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의과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대학들이‘연구중심병원을 넘어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해야 된다’고 톤을 높이고 있다.

그 목소리에 귀가 기울여지는 것은 이 책에 수록된 20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칼럼이나 인터뷰 내용이 한결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가 기존 칼럼에서 제기해 온 의료와 의학교육의 문제점 그리고 나아갈 방향성이 오히려 지금 더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동안 허 교수의 주장은 의학계 일각에서 이해를 달리하여‘이상론’으로 곡해되었거나 폄훼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허 교수가 말해온‘변화’의 총론에는 이론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현실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 아이러니다.

허갑범 교수는 이 책 서문에서“자연과학 계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의과대학에서 오직 임상의사만을 양성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설자리도 없을뿐더러 21세기의 꽃인 첨단 의생명과학을 글로벌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노학자가 아직도 소신을 굽히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의학신문사 刊, 194쪽, 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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